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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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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군부 「쿠데타」에 대한 책임을 지고 내각은 총사퇴한다』-. 61년5월18일 장면 내각은 정권을 혁명군에 넘겼다. 군복의 삼엄한 경비 속에 마지막 각의를 주재한 장 총리의 눈에는 이슬이 맺혔다.
4·19로 붕괴된 자유당의 뒤를 이어 탄생한 제2공화국은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의 상징이었으며 장면 내각은 국민의 개혁에 대한 의욕을 배경으로 했다. 그러나 후진국의 빈곤과 욕구불만, 자유에의 갈망은 폭발적이었고 정부는 이를 소화하지 못했다. 「데모」가 모든 문제를 단숨에 해결해줄 듯이 줄달음쳤다. 학생이 뛰고 혁신정당이 줄달음쳤으며 급기야 국회의사당난입사태까지 있었다.
정치는 이 욕구를 집약하고 선도해야했다. 그러나 그 대임을 맡은 민주당은 신·구파 파쟁을 격화시켜 총리인준에서 패배한 구파는 신당으로 이탈했고, 그 때문에 장 내각은 원내 안정세력을 얻지 못해 안팎으로 시달렸다. 위기설이 자자한 가운데서도 장 내각은 경제계획, 국토개발계획 등 의욕적인 시책에 착수하는 듯 했으나 새벽의 총성이 모든 것을 뒤집어 놓았다.
그 새벽 장 총리는 반도「호텔」 808호실에서 현석호 국방장관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선잠에서 깼다. 그는 혜화동 「칼델」 수녀원 깊숙이 몸을 숨기고 외부와의 연락을 끊었다. 그의 막료들과 혁명군, 미대사관측도 그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그의 각료들이 대부분 체포되고 윤보선 대통령의 혁명지지로 사태가 돌이킬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판단이 내려진 18일, 그가 가장 신임했던 장도영 중장(군사혁명 위원회의장)의 권유대로 피신처를 나와 정권을 넘기는 절차를 치르고 물러났다.
장 박사는 혁명군이 한강을 넘었다는 긴급사태에 직면, 측근들이 피신을 권유했을 때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피하느냐』고 말했다한다. 이 말은 선량한 시민다운 얘기일 뿐이다.
그는 평화적인 의회민주주의자이기는 했지만, 투쟁적이며 강인한 통치자가 되지는 못했다.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그는 교육가였으며 「가톨릭」신자였다.
그는 항일의 투쟁경력이 없다. 해방 후의 정치생활도 주미대사, 국무총리 등 순탄하게 상승하다가 부산정치파동을 계기로 이 박사와 결별, 야당대열에 참가했다.
민주당이 60년의 3·15선거직전 대통령후보(고 조병옥 박사)를 잃는 불행을 겪게 됐을 때, 그는 당대표 최고위원이자 부통령후보로서 정권투쟁의 전면에 나섰지만, 신·구 파쟁을 조정하고 통합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민주당정권에 대해서는 무능한 정권으로 단정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 시절은 자유와 민권의 황금시대라고 설명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어느 것이든간에 민중혁명 뒤에는 안정요소보다 불안요소가 훨씬 많은 것이고, 더욱이 민주당은 그 자신이 4월 혁명의 주체가 아니었고 보면 제2공화국의 비극은 숙명적인 것이었던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은 제2공화국을 「바이마르」공화국에 비유하기도 한다.
「바이마르」헌법하의 독일공화국은 전후의 무질서와 혁명적 물결의 혼란 속에서 안정도, 민주제도도 유지하지 못하고 무너졌다는 점에서 두 정권은 비슷한데가 있다는 얘기다.
장 박사는 혁명 후 그의 마음의 고향인 종교생활로 돌아갔다. 그는 군정하에서 반혁명사건으로 한때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는 66년6월9일 조용히 운명했다. 『장구한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에 진실이 가려질 것을 믿기 때문에 괴로움을 되씹으면서도 아무 말을 하지 않겠다』는 말만을 남기고…. <이영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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