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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정사실화」|값도 건물도 올려만 놓으면 「현실」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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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번 저지른 일은 어떻게 하느냐』는 딱한 논리가 「기정사실」이란 새 용어를 만들었다. 60년대를 통해 이 「기정사실」을 기존 질서를 파괴하기 일쑤있고 행정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리는 풍조를 이루었다. 불법 건물로 더덕더덕 얼룩져있는 서울의 도시 모습이야말로 그 「기정사실」이 판쳐온 으뜸의 본보기였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철골조립공법을 썼다는 H「빌딩」(서울중구남대문로2가)이 허가조건 보다 5층이나 더 올려지어 불법 건축물로 말썽이 났을 때의 일-
서울시 당국은 날로 솟아나는 불법 공정을 눈앞에 보고도 『시정하겠다』 『고발했다』 『철거하겠다고 얼버무리다가 끝내는 김현옥 서울시장 자신이 예의 「기정사실」을 들고 나왔다. 『69년 6월l일 이전에 허가된 모든 건물은 불법 건물이라고 하더라도 기정사실로 인정. 사후허가를 해주겠다』는 선언이었다. 이렇게 해서 「기정사실」은 또 하나의 불법건물을 합법화 시켰으며 시장 자신은 그 호화로운 「빌딩」의 준공일에 참석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고층 「빌딩」뿐만이 아니다 .서울의 산등성이마다 다닥다닥 올라붙은 판잣집은 선거가 있을 때마다 밤사이 그 수가 늘어났다.
사람들은 이제 건물에 한해서만은 『덮어놓고 짓는 게 상수』라는 생각을 품을 정도로 전례를 믿고있다.
공로를 안마당처럼 쓰는 주차행위도 마찬가지 「기정사실」의 예-.
각종 차량이 당연히 공로를 주차장으로 쓰는 것처럼 여가고 있다. 도시의 도로는 선이 아니라 아예 주차장과 돌출물로 범벅된 느낌.
집 장수들이, 밤에 몰래 수도 「파이프」를 본선에서 이어내어 불법수도를 놓는 것도 으례 사후에 「기정사실」로 인정되어 허가를 받을 수 있는 것으로 믿기 때문.
이런 풍조는 오물세와 쇠고기 값 연탄 값 이발료 목욕 값 등 이른바 협정요금의 인상방법에로 마찬가지로 적용되고있다.
지난 월말의 월급날 오랜만에 선심 쓸양으로 푸줏간에 물론 회사원 L씨(성북구돈암동)는 한 근에 4백원이라고 써 붙은 정찰가격대로 쇠고기 2근을 사려다 푸줏간 주인과 큰 싸움을 할 뻔했다.
「고기」1근에 4백50원씩 받은 지가 언제부터인데 그까짓 정찰가격을 찾느냐』는 주인의 대구였다. 정찰가격대로 지키지 않는 사실은 이미 「기정사실」이라는 것이다.
구공탄 값. 차값, 설령탄 값도 으레 『한번 오르면 그만』이라는 「기정사실」앞에 소비자들은 항상 울며 겨자 먹기로 뒤따르는 것이다. 심지어 담배 값 등 전매품에도 「기정사실」의 원리가 통용된다. 지금까지 담배 값이 인상되고 얼마쯤 지나면 으레 담배의 필이 낮아지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 경우 소비자들은 값은 똑같이 물고도 질이 낮아진 담배를 사 피워야하는 「기정사실」을 겪는다. 이 같은 원리에는 푸대접받는 ○1번의 시외 보통전화. 똑같은 설비를 갖고도 3등 객차를 2등 객차로 만들어 기정 사실화하는 선도여객운임 등이 마찬가지 원리에 해당된다.
처음엔 서슬이 퍼렇도록 좌석「버스」의 정원제를 단속했다가도 세월이 지나면 다시 입석「버스」화하는 경향도 똑같은 「기정사실」의 원리-.
『한번 저지르면 그만이라』는 그릇된 풍조는 준법정신을 흐리케 할뿐만 아니라 행정의 권위마저 스스로 떨어뜨리는 결과를 빚는다. 【이원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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