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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적 무력 과시보다 6·25 당시 재현에 초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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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호 03면

1 27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전승절’ 열병식에서 6·25 당시 군복을 입은 병사들이 행진하고 있다.
2 열병식에 참석한 6·25전쟁 참전군인들. 3 열병식에서 행진 중인 여군들. [평양 AP·로이터]

북한의 ‘전승절 60주년 행사’가 열리기 전 전문가들 사이에선 ‘최대 규모의 군사 퍼레이드가 있을 것이며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군복을 입고 등장할 것’이란 전망이 돌았다. 김정은이 대대적인 무력 과시를 한다는 예측이었다. 그러나 실제는 달랐다. ‘기대한’ 무력 과시는 없었고 컨셉트는 ‘6·25’에 맞춰졌다. 주변국 자극을 피하려는 계산일 수도 있다. 북한군 간부였고 군사 퍼레이드에도 여러 번 참가했던 탈북자 김한영(가명·45)씨와 함께 북한의 전승절 행사를 분석했다.
 
27일 평양시 대동강 옆 김일성광장. 오전 일찍부터 군인들이 모여들었다. 광장 옆 중구역의 대로에도 군인들과 각종 병기가 실린 차량들이 도열했다. 조선중앙방송이 이날 오전부터 중계한 북한의 ‘전승기념 열병식’을 위해서다. 열병식은 오전 10시, 김정은이 명예 위병대장 김병식 대좌의 열병 종대의 신고를 받는 것으로 시작됐다. 김한영씨는 “이날 열병식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서명된 날 평양에서 열린 전승 열병식을 재현한 것”이라고 했다. ‘6·25 컨셉트’는 크게 4개 포인트에 걸쳐 반영됐다.

북한군 출신 탈북자가 본 7·27 ‘전승절’ 60주년 행사

우선 주석단의 군복이다. ‘군복을 입을 것’으로 관측됐던 김정은은 평소대로 인민복을 입었다. 그러나 대장급부터 군모와 군복은 달랐다. 김정은의 오른쪽에 선 최용해 조선인민국 총정치국장(차수), 장성택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장 겸 국방위 부위원장(대장), 김정각 김일성군사대학 총장 (전 인민무력부 부장, 대장), 김영춘 조선노동당 정치국 위원(대장)은 흰색 군복이었다. 김씨는 “이들 복장은 6·25 당시 하계 장령(장성)의 복장”이라며 “김일성이 당시 그런 군복을 입었다”고 말했다. 박봉주 총리는 이들과 달리 노농적위대 군복이었지만 역시 6·25 때의 복장이었다. 나머지 장성과 병사들은 일반 군복이었다. 김정은의 고모인 김경희 조선노동당 위원은 2010년 대장 칭호를 받았지만 군복이 아닌 인민복 차림이었다.

15분에 걸친 최용해의 ‘대독 연설’도 6·25가 기둥이었다. 그는 6·25의 정신을 “50년대 정신”이라 했고 전쟁 참여자들을 “위대한 시대정신을 창조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27일 열병식에서 북한 학생들이 전쟁 당시 소년유격대 차림으로 행진하고 있다.

열병은 전형적인 6·25 당시의 재현이었다. 선두에 선 부대는 ‘초상기’ 중대. 김일성과 김정일의 초상을 그린 깃발을 꽂은 두 승용차가 각각 여러 부대기와 함께 행진했다. 그 뒤로는 만주 시절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활동을 상기하는 기마부대가 행진했다. 거기까지는 어느 행사에서나 반드시 지켜야 하는 형식. 그 뒤로 6·25 컨셉트가 이어졌다.

육·해·공 노병들이 트럭 위에 의자를 얹은 ‘대열차’ 9대에 앉아 나왔다. 이들 참전 병사는 예전의 군복을 입고 의자에 앉아 김정은이 서 있는 주석단을 향해 손을 흔들며 눈물을 흘렸다. 이어 ‘그때 그 부대’들이 잇따라 등장했다.

제일 먼저 ‘근위 제2 강건 보병사단’이었다. 강건은 6·25 당시 총참모장. 누런 인민복에 당시 개인 무기였던 ‘38 연식 보총’까지 손에 들었다. 호랑이 사단이라 불리는 김책 제4보병사단, 제12보병사단이 뒤를 따랐다. 6·25 때 가장 전투를 잘한 사단이라고 북에서 소문난 부대들이다.

이 사단들에 바짝 붙어 최희숙군관학교의 여군들이 따라 나왔다. 이들은 전쟁 때 간호병으로 참전했다. 해군에선 ‘미 해군 군함 볼티모어함을 4발의 어뢰로 격침시켰다’는 근위 제2어뢰 종대가 나왔다. 6·25 당시 제공권은 미군에 완전히 장악될 만큼 북한 공군은 형편없었지만 근위 56 추격기 연대(비행연대)도 공을 세운 부대로 등장했다.

부대들은 가로 24명, 세로 12명 총 288명이 지휘관 6명과 군기호위수(우리의 기수)가 든 깃발을 따라 자로 잰 듯 직사각형을 유지하며 움직였다. 두 손은 옆구리에 붙이고 발을 쭉 뻗은 뒤 허리 힘으로 50㎝ 위로 들어 올리는 전형적인 열병 걸음이다. 김씨는 “총참모부 전투훈련국 4처가 담당하는 이 열병을 위해 평양 인근 미림공항에서 6개월간 연습을 하는데 군악에 맞춰 걸음을 연습하다 보면 허벅지의 실핏줄이 터질 만큼 고되다”고 말했다.

한국에는 없는 정치공작대도 등장했다. 김씨는 “이들은 6·25 때 남한에 내려와 정치공작을 하던 부대를 보여 주는 것이고 노농적위대에 소속된 대학생들이 주로 이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조선중앙방송은 “해방 전쟁이 벌어지면 파견돼 정치공작을 할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전쟁 당시 활동했다는 소년 빨치산 대원도 등장했다. 병력 행진의 6·25 부분은 여기까지다.

그 뒤로는 ‘오늘의 북한’을 지키는 군 핵심 세력들이 행진했다.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을 선두로 김정숙해군대학, 김책공군대학, 김철주(김일성의 동생) 포병종합군관학교, 보병 지휘관을 양성하는 강건종합군관학교, 특수부대 장교들을 양성하는 태천군관학교, 탱크 지휘관을 양성하는 탱크·자동차병 군관학교가 이어졌다. 우리의 경찰에 해당하는 인민보안성 내무군도 나왔고 마지막은 만경대혁명학원 중대, 강반석 유자녀혁명학원 종대가 장식했다. 이들 마지막 두 학원은 북한 엘리트의 자녀가 입학하는 곳으로 미래 핵심 인재를 기르는 군사학교다.

무기 퍼레이드의 컨셉트도 같았다. 첫 번째로 나온 76㎜ 해안포, 82㎜ 박격포는 6·25 때 썼고 지금도 노농적위대가 사용한다. 57㎜·85㎜ 대공포도 마찬가지다. 전쟁 때 카투사라는 이름으로 알려졌고 지금도 한국이 신경을 곤두세우는 240㎜ 다연장포도 등장했다. 6·25 초기 서울 점령의 선봉에 선 유경수 105 탱크사단도 등장했다. 공군에선 특이하게 500MD 헬리콥터를 공개했다. 216 직승기 여단 소속인데 한국도 이 기종을 사용한다. 김씨는 “독일에서 헬기를 도입했다”고 말했다. 우리 군은 이 헬기가 한국을 공격할 때 군을 혼란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본다.

가장 눈길을 끄는 무기는 무인기다. 조선중앙방송은 이를 “초정밀 무인 타격기 중대”라고 설명했다. 이 무인기는 소련이 만든 신형 질(ZIL)트럭에 실려 발사대에서 발사하는 방식이다. 군 전문가는 “지난해에 선을 보인 것으로 새로운 무기는 아니다”고 말했다.

각종 무기가 선보이는 과정에서 상장 계급의 누군가가 김정은에게 끊임없이 뭔가를 말했는데 김씨는 “최부일 인민보안부장이 무기마다 설명해 주는 것”이라고 했다. 한국이 관심을 갖는 미사일의 경우 스커드, KN-02, KN-08이 등장했는데 모두 알려진 것으로 새 무기는 선보이지 않았다.

김씨는 “보통의 군사 퍼레이드에는 이번처럼 6·25와 관련된 요소를 반영하지 않는다”며 “열병식 규모가 클 때는 광장을 꽉 채울 정도였는데 이번엔 그렇지 않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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