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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마틴·루터·킹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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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68년, 미국의 여름은 봄과 함께 시작되었다. 4월4일 「테네시」주「맴피스」의 한「모텔」에서 성급하게 『무덤고 긴 여름』을 부르는 잔인한 총성이 울린 것이다.
백인 광신도인 「제임즈·열·레이」가 자신의 희뿌연 피부색에 악마 격인 자만을 즐기면서 쏜 흉탄을 맞고 1천만 흑인들의 지도자 「마틴·루터·킹」 목사가 「모텔」의 「발코니」에서 피를 쏟고 순교한 것이다.
『나의「킹」이 죽었다. 내가 만나는 첫 백인을 죽이겠다』고 울부짖은「미니애폴리스」의 한 흑인은 이웃집 백인을 쏘아 죽였다.
서부의「오클랜드」에서 동부의 「워싱턴」에 이르기까지「킹」의 피살에 흑인들의 분노가 물결쳤다.
「킹」의 죽음이 몰고 온 흑인 폭동은 미국 역사상 가장 격렬했다. 전국 1백여개 도시를 휩쓴 폭동으로 46명이 사망하고 2천5백61명이 부상했으며 2만여명이 체포되었다. 「킹」은 1929년 「조지아」주 「아틀랜타」 시에서 침례교회 목사를 하는 아버지와 국민학교 교사를 하는 어머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여느 흑인들처럼 「아틀랜타」에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킹」은「보스턴」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1954년부터 그의 아버지가 목사로 있던「몽고메리」의 조그마한 침례교회에서 목사생활을 시작했다.
「킹」가는 「킹」이전 두 세대를 줄곧 민권운동에 가담한 집안이었다.
그래서 「킹」의 아버지는 「킹」의 어릴 때 이름인 「마이클·루더·킹」을 도중에 독일의 종교개혁가「마틴·루터」의 이름을 따서「마틴·루터·킹」으로 고치고 아들이 인종차별에 신음하는 흑인들을 위해 헌신하도록 가르쳤다.
그가 세인의 주목을 끌기 시작한 것은 55년12월 「몽고메리」에서 일어난 「파크스」사건에서부터다. 흑인 재봉사 「로저·파크스」여인이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10「달러」의 벌금형을 받자 시의 흑인들은 「킹」을 앞세우자「버스·보이코트」시위에 들어갔다.
3백81일간 계속된「보이코트·데모」에서 흑인들은 「킹」의 탁월한 지도 아래 일사불란하게 행동 통일을 기했으며 결국「버스」에서 흑인 차별은 한법위반이란 대법원 판결로 흑인들의 주장이 관철되었던 것이다. 「킹」의 민족운동은 철학자「헨리·데이비드·소로」(미·『시민의 불복종』)와「간디」에 힙입은 비폭력 무저항이 특징이었다.
「킹」은 대중연설에 뛰어난 소질을 가지고 있었다.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마력을 가지고있는 그의 웅변온 그의 주장을 효과 있게 수행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킹」의 비폭력 저항이 소정을 이룬 것은 64년 「워싱턴」대행진 때다.
20만이 참가한 이 자리에서「킹」은 『백인의 인격은 인종차별 때문에 심히 왜곡되어있고 백인의 영혼은 심히 위협을 받고있다』고 경고했다.
64년 그는 「노벨」 평화상을 탔다. 어느새 그는「세계의 킹」, 「평화의 사도」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거목이 쓰러진 자리엔 공허가있기 마련이다.
「랠므·애버내디」가 그를 계승했지만 그의 지도력은 선배의 그릇을 채우지 못하고있다.
그러나 「킹」의 유지는 살아있다. 특히 그의 미망인「코레타」여사는 남편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가정의 굴레를 벗어나 정력적인 투쟁을 벌이고 있다. <김한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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