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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수카르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전쟁시대」의 소산기라는 60연대가 막을내린다 언필칭 40연대 혼란기· 50연대를 부흥기라 불렸지만 지역간 또는 국가간의 발전「템포」의 격차는 60연대의 격동과 혼란의 시대로 만들었다. 수세에는 영웅호걸도 많다. 60연대의 세계에 깊은 발자취를 남긴 역사의주인공들을 돌이켜 봄으로써 70년대의 세계에 대한 암시를 얻고자한다 【편집자주】
『나는 여자와 나라와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한것은 「수카르노」 의 영웅호색다운 고백이었다. 권력의 최상좌에서 여자와 나라와 자신을 함께「사랑」한 「수카르노」 의 화려한 생애는 50연대·60연대의 남태평양의 정치열풍의 핵심이기도 했다.
우상의 붕괴가 한시대의 종장을 가져왔는지`한시대의 종장이 우상의 붕괴를 재촉했는지 그전후 관계는 분명치가않다.
그러나 「수카르노」 생애의 영광의 극치와 몰락이 영웅시대인 60년대 전반 우상붕괴시대인 60년대 후반과 각각 때를 같이하고 있는것만은 사실이다. 「가나」의 「옹크루마」, 「이집트」의 「나세르」가 그러했듯이 「수카르노」는 60연대초에 전세계를 휩쓴 신생국가들의 「유색선풍」속에서 거친 해풍까지 침묵시킨다는 도도한 능변과 「평천하」의 야심으로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되었다가 60년대의 후반에 몰락하고 만것이다.
「수카르노」는 10대의 소년시절부터 반세기 동안 「자바」·「수마트라」의 산야와 「네덜란드」의 형무소를 무대로 독립을 위한 사투에 헌신했고 「인도네시아」가 독립하여 자신이 대통령이 된 뒤에도 그는 이른바 반 「네골림」(신식민지주의·신제국주의반대)투쟁이라는 것을 벌여왔다.
그러면서도 「수카르노」의 주변이 메마르지 않고 황량하지 않았던 것은 그가 스스로 말하듯이 「프랭클린·D·루스벨트」 (FDR)와 「클라크·케이블」을 함께 닮았기 때문이다.
FDR를 닮은 「수카르노」는 탁월한 진보적 지도자가 되었다. 45년8월 종전과 함께 「인도네시아」를 3백50년의 「네덜란드」통치로부터 독립시킨 이래 60년 서 「이리안」의 무력탈취, 63년 「말레이지아」연방과의 대결정책, 65년 「유엔」 탈퇴, 배경' 「자카르타」 추축형성 같은 그의 정력적인 활동은 그 공과에 관계없이 「반둥」회의와 「가네포」 (신생국가올림픽)의 실현과 함께 정치가 「수카르노」의 결단력과 영도력을 과시한 사건들이다.
그러나 그가 결국「자카르타」·북평추축의 과신으로 몰락하고 만것은 그의 「총명」의 한계와 60연대 중반을 갈림길로 한 영웅시대의 종말탓인지도 모른다.
「게이블」을 닮은 「수카르노」는 나이를 잊은 초인이요 호색가였다. 인도를 친선방문중 만찬을 주최한 어느 주지사의 미모의 딸을 후처로 납치해 가려다 실패하여 인도-「인도네시아」 관계가 한때 냉각했던 사건은 「인간 수카르노」를 이해하는데 빠뜨릴수없는 일화로 꼽는다.
「수카르노」는 결혼을 여섯 번했다. 실각할 당시 그는 네명의 아내를 가졌다. 그의 「걸·헌팅」의 결정판은 목수의 딸이요 「나이트·클럽」의 「호스티스」였던 일본 여성 「데위」와의 결혼이다.
「수카르노」가 자기를 권좌에서 추방한 장군들 앞에서 『나는 죽을수 없다.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에』라고 말했을때 그아내란 제4부인 「데위」를 의미했다. 그는 위엄있는 「보고르」 궁을 「데위」의 자살한 남동생의 이름을 따서「야소오」 궁 이라고 개명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59년 비상대권을 장악하여 본격적인 독재 「코스」에 들어선 「수카르노」는「나사콤」 (민족주의·종교세력」공산주의의 협력)체제아래 「인도네시아」 공산당 (PKI)과 야합, 중공세력을 끌어들여 과격한 좌경노선의 실행을 꾀하다가 65년9윌30일 친공「쿠데타」의 실패로 실각의 쓴잔을 들었다.
「수카르노」실각은 「아시아」진출을 노리는 「70연대의 포우」의 선수를 중공의 손에서 소련의 손으로 넘겨주었다는 역사적인 상대성을 갖는다.
정절을 지키겠다던 「데위」는 「파리」동경 「홍콩」을 무대로 젊은 남성들과 염문을 뿌리던 끝에「자카르타」교외에서 초라하게 인생과 권력의 황혼을 동시에 맞고있는 노쇠한「수카르노」를 상대로 이혼소송을 준비하고 있다.<김승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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