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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회담 대가성' 여부 정면 배치

중앙일보

입력

청와대의 지난 14일 대북 송금 관련 해명이 '현대그룹에 떠넘기기'였다면 16일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의 성명은 '청와대에 받아치기'라 할 수 있다.

정몽헌 회장은 이날 "대북 송금이 남북 정상회담 성사에 기여한 것이 사실"이라며 "남북 정상회담 성사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해 5억달러를 북한에 송금했다"고 말했다. 이는 지난 14일 임동원 대통령 외교안보통일특보의 "현대 측이 대규모 경협사업을 독점하기 위해 5억달러의 대가를 지불하기로 했다는 보고를 받았다"는 내용과 정반대다.

林특보는 현대가 대북사업 권리금조로 5억달러를 북한에 줬다고 주장한 데 비해 鄭회장은 남북 정상회담도 염두에 두고 줬다고 밝힌 것이다. 이날 鄭회장의 음성은 어눌했지만 단호했다.

◇청와대와 현대, 누군가는 거짓말=5억달러 송금을 놓고 청와대와 鄭회장의 해명이 다른 점은 크게 두가지다. 첫째는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대가성이다.

林특보는 5억달러가 "민간기업의 자체적인 판단에 따른 상업적 거래"라고 강조했다.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대가성이나 뒷거래설을 강력히 부인한 것이다.

그는 "현대 측에 따르면 (5억달러는) 경협사업 독점권에 대한 대가며, 이와 관련한 협상도 정상회담이 논의되기 훨씬 전에 시작됐다"며 "남북 정상회담 개최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鄭회장은 "남북 정상회담 성사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 모두 5억달러를 북측에 송금했다"고 말했다. 기본적으로 5억달러가 대북 사업 대가라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순수한 대북사업용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송금 과정의 의혹이다. 청와대는 5억달러 중 2억달러의 송금 과정에만 개입했으며 그것도 단순히 환전 편의만 봐줬다고 주장한다.

林특보는 "국정원장 재직 중이었던 2000년 6월 5일께 현대 측에서 급히 환전 편의 제공을 요청해 왔다는 보고를 받고 관련 부서에 환전 편의 제공이 가능한지 검토해 보라고 지시했다"고 말했다. 나머지 3억달러는 현대가 해명해야 한다며 공을 현대 쪽에 넘겼다.

그는 또 "국정원은 외환은행에서 환전에 필요한 절차상의 편의를 제공했고, 6월 9일 2억달러가 송금됐다"며 "이와 관련해서는 상부에 보고된 바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鄭회장은 3억달러의 용도와 송금경로에 대해 "지금은 밝힐 수 없다"며 입을 다물었다. 또 국정원에 환전 편의를 부탁한 이유에 대해서도 "죄송하게 생각한다"며 해명하지 않았다.

◇총론은 같지만, 각론은 달라=鄭회장의 해명은 대체로 이틀 전 청와대 발표와 입을 맞춘 듯했다. 대표적인 것이 현대와 정부 중 남북 정상회담을 누가 먼저 제안했느냐는 문제다. 鄭회장은 "남북 정상회담이 우리 사업에도 도움이 될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에 내가 먼저 제의했다"고 말했다. 남북관계의 특수성 때문에 정부 당국의 깊은 이해와 협조가 불가피했기 때문에 정상회담을 현대가 앞장서 추진했다고 분명히 밝힌 것이다.

청와대 역시 이런 사실을 인정했다. 林특보는 "현대가 북한 측에 정상회담 가능성을 타진했고, 북한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말했다. 대신 "당시 현대의 정몽헌 회장과 이익치 회장이 (남북의) 만남을 주선하기 위해 양측을 소개한 적은 있으나, 정상회담을 위한 협상 과정에는 참여하지 않았다"고 여운을 남겼다.

현대와 정부가 일종의 대북 커넥션을 맺었고, 총론에서는 동반자 관계였다는 점을 양쪽이 모두 인정한 셈이다.

그러나 남북 정상회담과 관련해서는 분명한 입장 차이를 보였다. 청와대가 현대에 모든 공을 떠넘기는 것을 鄭회장으로선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판단한 듯하다.

鄭회장은 "대북 사업은 창구 역할이 필요했으며 (현대가) 단순한 독점자로 볼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틀 전 林특보가 "현대가 '독점사업의 대가'로 5억달러를 지급했다"며 몰아간 것을 정면에서 반박한 것이다.

鄭회장은 또 "경험부족 때문에 욕심이 앞선 탓"이라며 "앞으로는 국내 투자기관, 전문기업, 관계기관과 긴밀히 협조해 투명하게 사업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청와대와 비공개로, 극비리에 추진한 대북사업이 결과적으로 현대에 화근이 됐다는 심사를 토로하는 듯했다.
이정재.이상렬 기자jjy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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