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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억 들여 세워준 인력개발센터 … 컴퓨터·한국어 등 연 1000명 배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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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6·25전쟁 때 필리핀 전투부대 10연대 소속으로 참전했던 막시모 영(91) 예비역 대령이 마닐라 보니파시오에 있는 한국전 참전기념관 내 기념홀에서 전시된 사진 자료를 설명하고 있다.

필리핀 수도 마닐라 중심가에서 멀지 않은 보니파시오 국립묘지엔 1967년 세워진 한국전 참전비가 있다. 삼각면체 형태의 참전비 한쪽엔 태극기 부조 아래 ‘필리핀 참전군인의 희생을 기린다’는 내용으로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친필이 새겨져 있다. 박 전 대통령은 66년 한국 정상으로선 처음으로 필리핀을 방문했다. 당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에게 “한국이 필리핀처럼 잘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라고 인사말을 했다고 한다. 그해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30달러로 필리핀(202달러)의 3분의 2에 불과했다. 지난해 한국은 2만3112달러로 필리핀(2614달러)의 9배 가까이 됐다.

 반전된 역사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국립묘지에서 가까운 한국전 참전기념관이다. 5000㎡ 부지에 한국 정부가 11억9000만원을 들여 지은 지상 3층 건물로 지난해 3월 개관했다. 1층 전시홀에는 필리핀 전사자 112명(참전 총인원은 7420명)의 이름을 새긴 기념비 등이 있다. 이 기념관과 대각선으로 마주한 건물엔 한국 코이카가 지원하는 한-필 인력개발센터(HRD센터)가 운영 중이다. 건축비 60억원을 포함해 기자재 등 예산 전액을 한국이 부담했다. 60년 전 파병의 우정을 한국이 인재교육으로 보은하고 있는 셈이다.

 로베르토 디마유가 센터장은 “HRD센터는 양국 역사의 의미 있는 성과”라며 “필리핀 참전용사들의 유산과 공헌을 한국이 기억한다는 상징”이라고 말했다. 디마유가 센터장 개인에게도 각별한 의미가 있다. 2010년 사망한 그의 아버지 페드로 디마유가 대령도 한국전에 20연대 본부중대 중위로 참전했다. “선친은 한국에 다시 갈 기회가 없었지만 저는 97년, 2005년 두 차례 갔지요. 폐허로만 들었던 한국의 눈부신 발전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필리핀이 한국의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싸운 보람을 느꼈습니다.”

 산업체 숙련인력 배출을 목표로 하는 HRD센터는 컴퓨터·애니메이션 등 6개 과정에서 연 1000명을 배출한다. 특히 인기가 높은 한국어 과정은 현재 5주짜리 코스에 120명이 등록해 있다. 초급 과정을 듣는 27세 에드가르도의 할아버지도 한국전 참전군인이다. 참전관 석판에서 조부 이름(라리오사 빅토르)을 찾아낸 그는 “필리핀은 과거에 도왔고 한국은 현재 돕는다. 서로 교환하는 것이 우정”이라고 말했다. 여느 필리핀 젊은이처럼 한류 팬인 그에게 한국은 영화 ‘어린 신부’와 K팝 ‘강남스타일’의 나라다. 에드가르도는 “필리핀이 한국처럼 잘살게 되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참전관에서 만난 막시모 영(91) 대령은 50년 참전 당시 가난했던 한국을 생생하게 떠올렸다. 생각나는 풍경이 사과나무·뱀·아궁이·볏짚더미 같은 것들이라고 했다. “배곯는 아이들이 너무 불쌍해서 부대에서 잡일을 시키고 수고비로 매일 빵 5개를 줬다. 그런데 아이가 빵 3개만 먹고 2개를 챙겨가며 ‘동생들 줘야 한다’고 말하더라. 그 아이들이 커서 대한민국의 발전을 이룬 것 아니겠느냐.”

 2010년 한국전 발발 60주년을 맞아 한국을 다시 찾은 영 대령은 고층빌딩과 한강 다리 등에 감명받았다고 했다. 그는 “이곳 참전관에서 한국인 관광객을 자주 만나는데 한국전쟁에 대해 잘 모르더라. 역사 수업 때 이런 내용이 많이 알려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 뉴욕·오타와=정경민 특파원, 워싱턴·내슈빌=박승희 특파원, 런던·버튼온트렌트=이상언 특파원, 파리=이훈범 기자, 아디스아바바·메켈레·앙카라=정재홍 기자, 마닐라·방콕·촌부리=강혜란 기자, 보고타·카르타헤나·키브도=전영선 기자, 캔버라·골드코스트=유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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