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재수·직장포기 … 유치원 찾아 삼만 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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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의 만 3~5세 유아 140만 명 중 12만여 명만 공립유치원에 다닌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추첨에 붙어야만 들어갈 수 있다. 서울 성북구의 한 엄마가 자녀를 유치원에 데려가고 있다. [김성룡 기자]

직장에 다니는 정모(38·여)씨는 지난해 3월 서울 서초구 잠원동 집에서 차로 30분 걸리는 사립유치원에 다섯 살짜리 아들을 입학시켰다. 원래는 집 근처 사립유치원 두 곳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유아 대상 영어학원이나 놀이학교도 있지만 내키지 않았다. 교육비가 비싼 데다 정부의 유아교육비 지원(지난해 기준 월 20만원)을 못 받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씨는 두 유치원 추첨에서 떨어졌다. 한 곳은 경쟁률이 13대 1이었고, 다른 곳은 11대 1이었다. 원서 접수가 안 끝난 유치원을 수소문해 강남구 도곡동의 한 유치원을 찾아냈다. 경쟁률이 3대 1로 낮은 편이어서 운 좋게 합격했다. 하지만 거리가 멀어 집 근처까지 유치원버스가 오지 않았다. 정씨가 출근길에 아이를 데려다주고 오후 2시 수업이 끝나면 집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데려오는 생활이 1년간 지속됐다. 정씨는 결국 올해 초 유치원 근처로 이사를 했다. 그는 “매일 왕복 1시간씩 차를 태우는 게 아이에게 미안했고, 가까스로 적응한 유치원을 옮길 엄두가 안 났다”고 말했다.

 집 근처의 ‘좋은’ 유치원에 자녀를 보내는 것은 쉽지 않다. 유치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전국적으로 유치원 취학연령인 만 3~5세 아이는 140만 명이다. 그러나 유치원에서 받을 수 있는 인원은 61만3000명(43.5%)으로 절반이 채 되지 않는다.

 본지가 태교·육아일기 무료출판업체인 ‘맘스다이어리’와 함께 유치원 학부모 261명을 설문조사했다. 그 결과 정씨처럼 유치원 입학을 위해 추첨을 하거나 대기한 경험이 있는 학부모가 38.7%(101명)나 됐다.

 공립유치원에 보내는 건 더욱 어렵다. 학부모 선호도가 높아서다. 지난해 4월 국회예산정책처 조사 결과만 봐도 그렇다. 학부모들에게 자녀를 보내고 싶은 보육·교육시설을 고르게 했더니 1위가 공립유치원(84.7%·복수응답)이었다. 2위는 국공립어린이집(54.7%), 3위는 사립유치원(31.4%)이었다. 본지 설문에서도 학부모 83.1%(217명)가 자녀를 보내고 싶은 유치원으로 공립유치원을 꼽았다.

 지난해 공립유치원 원생수는 12만7347명. 전체 유치원 수용 인원의 20.7%에 불과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학부모들 사이에선 “공립유치원 보내기가 대학 입학보다 어렵다”는 말도 나온다.

 어린이집에 아들(5)을 보내던 직장맘 박모(43·서울 동작구)씨는 지난해 집 근처 공립·사립유치원 각각 한 곳에 원서를 넣었다. 결과는 모두 탈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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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유치원도 있었지만 ‘원장이 수익을 많이 따진다’ ‘교사가 원생들을 잘 안 돌본다’는 소문 때문에 못 보내겠더라고요. 1년만 더 기다려보고 안 되면 아예 직장을 그만두고 제가 키우려고 했어요.”

 박씨는 올해 다시 원서를 넣어 가까스로 공립유치원 추첨에 붙었다. 그는 “사립을 보냈으면 한 달에 40만~50만원은 들었을 텐데 여기는 15만원 정도면 퇴근할 때까지 아이를 맡길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공립유치원에 떨어진 학부모들은 상대적으로 비싼 사립유치원으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다. 사립유치원은 유치원비·프로그램 등이 천차만별이다. 인기 있는 곳은 공립만큼 경쟁이 치열하다. 인천에서 다섯 살 아들을 키우는 직장맘 곽모(35)씨는 “한 곳이라도 붙어야 하기 때문에 입학 추첨 때면 보통 4~5곳씩 원서를 넣는다”고 말했다.

 아예 유치원 입학을 포기하는 이들도 있다. 주부 지모(39·서울 중구)씨는 내년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딸을 계속 어린이집에 보내고 있다. 지난해 근처 사립유치원으로 옮기려다 추첨에서 떨어졌기 때문이다. 지씨는 “혹시 유치원을 다닌 친구들에 비해 공부가 뒤처질까 봐 학습지를 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이 어린이집엔 비슷한 이유로 남아 있는 일곱 살짜리 아이들이 30명을 넘는다.

 하지만 힘들게 유치원에 들어가더라도 만족도는 그리 높지 않다. 본지 설문조사에서 ‘지금 다니는 유치원에 만족하느냐’는 물음에 ‘만족한다’고 답한 사람은 47.9%로 절반이 안 됐다. 학부모들은 불만족 이유로 “유치원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관심이 부족하다” “내가 내는 돈이 어떻게 쓰이는지 모르겠다” “학급당 인원수가 너무 많다”고 지적했다.

 교육감 선거 때마다 공립유치원 증설 공약이 나오지만 잘 지켜지지 않는다.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은 2010년 취임 당시 “서울의 424개 동마다 한 곳씩 공립유치원을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문용린 현 교육감 역시 “현재 157개인 공립유치원을 2배로 늘리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곽 전 교육감은 19곳, 문 교육감은 임기 첫해인 올해 15곳을 신설하는 데 그쳤다. 서울시교육청은 “예산·부지 부족과 사립유치원의 반대 등으로 유치원을 늘리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설명했다.

◆특별취재팀=성시윤·이한길 기자, 민경진 인턴기자(부산대 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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