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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속의 한국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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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해외영주교포수는 60만 재일교포를 제외하고 68년11월 현재 약4만명이 조금 넘는 정도이고 비영주자까지 합하면 6만명에 가까우나 그중에는 재외국민등록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실제 수는 이보다 조금 많을 것으로 전문가용은 추산하고 있다. 지역별로는 미주·아주의 순서이고 이민이 가장 많은 지역은 남미, 해외취업 근로자는 아주 지역이 약65%를 차지하고 있다. <허준기자>

<아주|재일교포빼면 천명정도|한국군파월로 진출문열리고>
한국인이 가장 많이 진출한 지역이 「아시아」지역이지만 일본의 60만 교포를 뺀 나머지 지역에는 약1천명의 교포들이 중국「홍콩」태국 월남 「필리핀」「인도네시아」대만「말레이지아」등 각국에 살고있다.
자유중국(대만)에 한국인이 처음 이주한것은 46년전인 1923년깨로 당시 항일투사수명이 7, 8명의 선원들과 함께 상륙한것으로 보고있다.
현재 살고있는 교포들은 제2차대전말 일본의 강제징용으로 끌려갔다가 그대로 남은 사람들과 중국본토가 적화되자 대륙에서 건너간사람등으로 1백65가구, 약6백50명이며 생활정도는 대부분 중류를 넘지 못하고 있고 어업에 종사하는 교포가 비율로 보아 많은편이다.
교포들은 47년8월 대만성 한교협회를 창립,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며 한교순보를 발행하고 있다. 일본을 제외하고 한국학교가 있는 유일한곳이며, 대북·기강·설웅등 3개지역에 한국학교가 있다. 한편 60년대에 들어서 월남전은 한국의 인력과 기술이 동남「아시아」지역으로 진출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 주었고, 월남평화를 돕기위한 5만명의 국비파월은 우리나라를 널리 인식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한국군이 월남전에서 이룩한 훌륭한 전과와 용맹성, 그리고 전쟁복구사업은 월남뿐아니라 다른나라들에 우리의「이미지」를 심어주기도 했다.
월남전과 관련하여 건축하역을 비롯한 각종기술자 1만4천여명이 월남에 진출했고, 특히 건축업은 태국과 태평양의「괌」도 기지건설 공사를 떠맡을 정도로 크게 뻗어났다.

<북미|타국계보다 비교적 우위|거의가 2·3세로 주의회의원도>
북미지역에 처음으로 건너간 한국인은 1903년「하와이」로 이민간 사람을. 「하와이」주의 인구 약70만명중 한국인계는 약8천명으로 추산되고 있으나 대부분이 2세 또는 3세들로 미국시민권을 얻은 사람들이다. 1세들은 국가없는 민족으로 오랫동안 설움을 받아왔고, 또한 독립운동에 물심양면으로 참여했었기 때문에 애국심이 강하나 이들은 이미 사망하거나 고령으로 대부분이 은퇴하여 별로 활동을 하지않고 있어 2세내지 3세들에 대한 지도가 요청되고 있다.
한편 1세들중에는 과거에 이룩한 재산을 기반으로 하여 「아파트」경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아 2세및 3세들은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타국계사람보다 비교적많으며 사회적으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직업별로는 주의회의원·실업가·변호사·공무원·의사·교사·목사등 「하와이」에서는 중국인계나 「필리핀」계보다는 비교적 우의에있다.
「신한민보」을 발행하고 군정때 입법위원도 지낸 김호씨와 김동구씨는 「킴즈·브머더즈」란 이름으로 「캘리포니아」에서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는 백만장자로 알려져있다. 식료품가공공장을 경영하는 「피터·현」, 의사인 김창하, 원예를하는 송철씨등도 백만장자로 알려져 있고 그 중에는 콩나물장사로 치부한 사람도 있다.
현재 외무부에 등륵된 북미지역 교민수는 미국이 2만2천4백명97으로 되어있으나 유학생·공무원및 등록하지 않은 사람까지 합하면 3만명이 훨씬 넘는것으로 추산되고 있으며 「캐나다」에 약1천7백명이 살고있다.

<구·아|유학생들이 토대 잡아|중립국외교강화 의사진출 현저>
「아프리카」와 「유럽」지역을 통틀어 이 지역에 영주하고있는 교포는 1백명 내외에 불과하다.
구주지역의 교포들은 유학생·교사·의사등 사회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그대로 눌러 앉은 「캐이스」가 대부분 「아프리카」지역에도 영주교포는 거의 없지마 제2공화국 발족과 더불어 정부가 추진한 대중립국외여강화방안으로 의사들의 진출이 활발하여 현재 61명의 한국의사들이 「우간다」 「레소토」 「말라위」 「니제르」 「다오메」 「리비아」 「아이버리코스트」 「이디오피아」등지에서 일하고있고, 현지로부터 많은 환영을 받고있다.
한국인의 「아프리카」진출은 62년 「카이로」총영사관과 「모로코」대사관이 설치되면서부터 시작됐는데 「이디오피아」에는 이근완씨가 지난해 5월 방한했던 「하이리레·셀라시에」황제의 정원사로, 윤선우씨가 WHO(세계보건기구)직원으로, 전서울대농대교수인 박홍수씨가 FAP(국제식량농업기구)직원으로「보츠와나」에서 일하고있다.

<중남미|거의가 이민으로 정착|조상들은 반노예의 어려운 생활>
중남미지역에 정착한 우리나라사람은 거의 대부분이 이민으로 건너간 사람들. 현재 등록된 교포수는 「멕시코」1천2백46명, 기타 8개국에 4천1백여명.
그중 한국인이 첫발을 디딘 「멕시코」이민사는 우리나라이민사중 가장 비극적이다. 1905년 이조고종황제의 빙표(지금의 여권)을 가지고 노동자로 계약을 맺어 최초의 한국이민들은 농업노동자였다. 이들의 생활은 반노예적 상태에서 채찍을 맞아가며 생활했다.
지금은 대부분이 2세들, 중류정도의 생활을 하고 있으며 음식점·수리업등 상업과 「서비스」 업에 종사하고 있다. 비영주교포들로는 「자메이카」 「안티구아」 「니카라구아」등에 의사23명이 있고 「엘살바도르」에는 대통령고문겸 한국명예영사인김이배씨와 체육교사1명이 거주하고 있다.
남미에 진출한 최초의 한국인들도 역시 이민으로 건너간 사람들이며 지금까지 우리이민이 가장많은 지역. 56년초 인도에서 건너간 10명의 반공포로출신들이 「아르헨티나」에 입국한 것이 남미이민의 시초로 알려져있다.
62년 1백70명의 이민이「브라질」에 정착한 이래 남미로 건너간 우리나라이민들은 69년7월말 현재 총5천6백88명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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