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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캄보디아서 돌아온 박정환소위 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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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나한테 한대 얻어맞고 나가 떨어진「베트콩」장교는 옷을 툭툭털고 일어서더니 이번엔 다른 사병에게도 똑갈이 시범을 해보라고했다. 나는 기교를 다 부려「베트콩」사병들을 하나하나 닥치는대로 사정없이 팔을꺾고 걷어차곤했다. 이를 본 장교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감탄하며「지금 제일 먹고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금방 먹을것이라도 줄듯이 물었다.

<태권도 위력 실감하자 그만큼 감시도 엄중히>
나는 그들이 줄수있는 것이라곤「바나나」밖에 없다는 것을 뻔히 알고있으므로『「바나나」나 실컷 먹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는『다음번에「바나나」를 실컷 먹여주겠다』고 말했다. 놈들이 역시 우리 태권도를 무섭게 느낀다는 것을 새삼스레 실감하며 나는 막사로 돌아왔다.
나는 여전히 아파서 거동을 못하는 채씨에게『이제 조금만 있으면「바나나」를 실컷 먹을수 있을것』이라며 위로해 주었다. 그 이후「베트콩」들은 나를 퍽 소중히 다루는 듯 했으나 반면 나에대한 감시는 한층 더 심해졌다.
수용소에서 머무른지 1주일후 우리는 다시 야간에 어딘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때는 「베트콩」이 수없이 파묻은 지뢰밭을 통과했기 때문에 행군이 극히 조심스러웠다. 넓고 깊은 늪지대를 통나무로된 징검다리위를 건너면서 이른 새벽에 우리들 1백50여명의 포로들은 깊은「정글」속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50명을 1개조로하여 움막을 짓고 방공호를 팠다. 땅이 낮은지대의 방공호 속에는 물이 가득 괴어있어 질퍽질퍽했다. 그 무렵에도 채씨는 몹시 심하게 아파서 거동을 할수없었으며. 매일 나는 누룽지를 얻어 죽을 만들어 그에게 갖다주었다.

<월남군과 또 탈출계획|신문엔 태권도만 안다>
나는 때때로 믿음직한 월남군장교및 상사들과 탈출을 계획하곤했다. 이것을 눈치챈 채씨는『우리는 형제간이나 다름없지않느냐. 그러니 혼자 도망가진말라』고 눈물을 흘리며 누운채 나에게 애원했다. 어느날 갑자기「베트콩」장교가 나를 불렀다. 통나무다리를 여러번 건너 막사에 가보니 나보다 키가 약간작은 중국계의「리·꾸이」라는 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지역사령관으로 보였다. 그는 내키가 자기보다 크므로 나를 앉힌뒤 꽤 유창한 영어로 나를 직접 신문하기 시작했다. 내 인적사항과 군사적인 면을 물었지만 나는『태권도 교관이므로 태권도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고 대답하자, 그는 다시『우리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칠 의사는 없느냐』고 물었다.
그리고는『「하노이」를 거쳐서 북괴로 가라』고 나에게 강요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고국에서 나를 기다리며 매일같이 기도드리고 있을 불쌍한 홀어머님과 다섯명의 어린동생들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올랐고, 조국의 따뜻한 품이 못내 그리워져 왈칵 치밀어 오르는향수의 눈물을 누를길없었다. 그 순간 나는 어떤 답변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나는 너희들의 포로이므로 월남전이 끝나면 대한의 조국으로 보내줄수없느냐』고 말했더니 그는 내의사를 존중하는체 하면서도『북괴로 가는것이 더 좋을것』이라고 말했다.
나는『그것은 내 일신상 중대한 문제이므로 내일아침에 생각해서 대답하겠다』고 약속하고 막사로 돌아왔다. 그러나 채씨에겐 아무런 말도하지 않았다.
누워서 내 표정을 읽은 채씨가『무엇 때문에 부르더냐』고 꼬치꼬치 묻기에 나는 마지못해『그들이 우리에게 북괴로 가라고 한다』고 말했더니 그는『그렇게 승낙하는체 하는것이우선 살 길이 아니냐』고 말했다.
우린 마음속에 항상 탈출할 굳은 결심이 서 있으므로 채씨 말대로 우선 승낙하기로 결정했다.
며칠이 지난 어느날 밤 12시쯤이었다.「베트콩」들은 우리 두사람만 불러내더니『너희들 두 사람만 따로 분리한다』고 말했다. 나는 같이 탈출하기로 약속했던 월남군소위와 상사를 만나 그들의 손을 굳게 잡으면서 말없는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베트콩」들은 나를 다시 꽁꽁 묶었다.
그러나 채씨는 몸이 성치못해 묶지 않았다. 우리는 다시 조그마한 배에 태워졌다.
배를 탔을때 전에 몹시 맞았던 나의 허리는 아프기 시작해서 앉아있을수 조차 없었다.
도저히 몸을 가눌수 조차 없을정도여서 나는 드러누워 버렸다.
배는 조그마한 강을따라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간뒤 새벽녘에 숲이 몹시 우거진 한「정글」에 다다랐다.
그 앞에는 늪과 대나무가 빽빽이 들어서 있었고, 뒤에는 강물이 흐르고있는 흡사 섬과도갈은 곳이었다.

<식사는 하루에 두끼니|쥐고기를 토끼라 속여>
밤에는 강물이 조금 빠졌으나 아침에는 우리가 자는 곳 까지 물이 찰 만큼 들어오곤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방공호도팠다. 하루는 인솔장교인「리·꾸이」가 와서 우리에게『토끼고기를 먹을 줄 아느냐?』고 하기에『아주 감사히먹겠다』고 말하며, 그가 주는대로 토끼고기를 먹었다. 그러나 그로부더 3일후 그들이 쥐를 요리하는것을보고 우리가 토끼고기인줄알고 먹은것이 쥐고기라는것을 비로소 알았다. 나는 그들에게『토끼고기는 그만먹겠다』고 하자 얼마후 강가에앉은 우리에게 바늘과 낚시를주며『무기를 낚아보라』고 강요했다. 식사는 하루에 단 두끼뿐이었다. 그 때문에 몹시 배가 고팠으나, 그러면서도 우리는 밥알을남겨 고기를 낚는데 사용해야만했다.
채씨와 내가 낚시질을 하던 첫날엔 고기도「베트콩」을 닮아서 그런지 우릴 알아봐서 그런지 상오중에는 한마리도 못낚았다. 몸이 아픈 채씨는 포기해 버렸으나 나는 그래도 계속 낚았다. 저녁때까지 손가락만한 고기 두마리밖에 못 낚았으므로 그날밤 저넉식사는,「바나나」껍질과 두마리 고기를 넣어 소금을 뿌린 국을 끓여 먹었다.
그날 저넉식사때도 나는 우리식사를 위해, 아니 쥐고기를 먹지않기 위해 밥알을 남겨두어야만 했다. 얼마후에「배트콩」이 나에게 와서『좀 더 잘 낚으라』고 하면서 밥알대신 개미알을 주고갔다.
그 다음날부터 물고기가 아주 잘 잡혔으나 우리에게 배당되는 끼니때 고기는 여전히 두마리뿐이었다.
그곳에선 감시가 하도심해 대변조차 제대로 혼자 보짙못했다. 변을 보러가자면 외나무다리를 건너야하는데 내가 변을 볼때는 2명의「베트콩」이 항상 뒤따라 일이 끝날때까지 AK (자동화기) 를 댄체 감시하곤했다. 그곳에서도 또 세뇌공작이 시작되었다.「베트콩」들은 호지명의 선전부터 시작해서「베트민」및「디엔비엔푸」전쟁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가하면 가끔「사이공」이 함락되었느니하는 엉뚱한 소리를 해서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채씨의 병세 악화일로|강변의 꽃도 슬프기만>
채씨는 갈수록 아파서 어느날 나는「베트콩」장교에게『나는 군인이고 장교의 포로신분이니 너희 마음대로해도 좋으나 채씨만은 민간인이니 돌려주는게 어떠냐』고 말하자 그는 몹시 성난열굴로 노려보았다. 우리들은 각자 검정옷을 한벌씩 받은 뒤 어느날 이른 저녁, 황혼이 드리운「정글」속에서 조그마한「보트」를 타고 다시 어디론가 끌려갔다.
강가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피었고, 붉은 저녁놀에 반사된 물과 강변의 하얀 이름모를 꽃들은 절경이었으나 그것들은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만 했다.
나는 하늘을 쳐다보며『주여, 저릍 지켜 주시옵소서. 저의 조그마한 신앙일지라도 기억하여 주시옵고 어떠한 고난에 처했을지라도 이겨나갈수있는 능력과 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하며기도했다. 또 눈물겹도록 집안 생각이났다.
우리가 탄「보트」는 어느「바나나」밭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많은「베트콩」들읕 보았다. 아마 수천명에 이르는 것 갈았다. 그곳의 가까운 들판에있는 집들은 미군 포격으로 불타고 있었다.「바나나」밭에는 약 2백명의월남군 포로들이 집을 짓고 있는 듯했다. 그곳에서 3, 4일 머무른후 우리는 다시 끌려 걸어가 밤늦게 어느「정글」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또 며칠간 방공호를 파는 노동을 했다.
채씨의 건강도 어느정도 회복되었다. 어느날 밤 미군의 무차별 사격이있었다. 포탄 한알이우리들 바로옆 5m밖 진흙탕에 떨어졌다. 위기일발의 긴박한 순간이었으나 피할겨를이 전혀없었다.

<위기일발의「불발탄」|날이 갈수록 조바심만>
그러나 다행히도 불발탄이었던 것이다. 정말 천운을 타고났다고나할까? 채씨는 신에대한감사의 눈물을 흘렸고, 나는 하느님께 몹시 감사하며 기도를 올렸다. 대부분의 「베트콩」들은 그들이 무엇때문에 싸우는지 몰랐으며, 또 공산주의가 무엇인지도 잘모르는 것 같았다. 다만 외세를 무척 증오하는듯한 심정을 지니고있었다.
그린예로「베트콩」들은 미군수송기가 높은 하늘을 날며 지나는 것을 보고도 무모하게 예광탄 자동소총을 하늘에대고 마구 갈겨댔다. 그런뒤 5분뒤면 어깁없이 미군「팬텀」기 2대가 날아와 주변을 기총소사로 갈기곤했다. 군사적으로는 그들의 위치를 알리는 무모한짓을 엉뚱하게 저지르곤 한다.
3월25일 우리는 다시「안·머이」 란자에 인솔되어 7명의「베트콩」과 함께「보트」를 타고 진짜「하노이」길을 향해 떠났다.「안·머이」란자는「하노이」길을 가장 잘아는 길잡이라는것을 전부터 익히 들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틀림없이「하노이·코스」를 따라 가는 것으로 믿어졌다. 날이 갈수록 탈출의 희망이 사라지는 듯 싶어 암담해졌다.
다시 행군이 시작된 어느날 우리들은 강이 좁아 배가 다닐수 없어서 밧줄을 배에 매어 끌고 가야만 했다.
뜨거운 태양 아래 지친 우리가 그 배를 끈다는 것은 매우 고된 일이었다.
그날 낮이었다.
「베트콩」들은 점심을 먹은후 우리에겐 남은 찌꺼기를 주었다. 채씨는 그 밥을 본 후 돌아 앉아서 엉엉 소리내어 울었고 나는 조금씩 먹었다.
그때「베트콩」이 와서 내게『왜 밥을 먹지 않고 우느냐?』고 물어 나의 입장은 매우 난처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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