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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처음 온 고갱, 환영만 할 수 없는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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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폴 고갱,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1897∼98, 139.1×374.6㎝, 캔버스에 유채. [그림 보스턴 미술관]

마흔 아홉, 이룬 것도 없어 잃을 거라곤 자존심뿐이었다. 고갱(1848∼1903)은 그걸 지키려고 프랑스령 타히티에 스스로를 유배시켰다. 아내가 5남매 중 가장 아끼던 딸아이의 사망 소식을 보냈다. 15년 전, 파리 주식시장의 붕괴로 다니던 은행이 파산하자 전업화가가 되면서 별거를 선언했던 그녀다. 컬렉터이자 주말화가로 유복했던 금융인 고갱의 삶은 서른넷, 그때 바뀌었다.

 딸의 죽음 후 반 년간 붓을 들지 못한 채 끙끙 앓았다. 가톨릭에 대한 회의마저 들었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당시 그의 화두였다. 같은 제목의 139.1×374.6㎝짜리 대작을 꼬박 한 달 동안 밤낮으로 그렸다. 인간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담은 그림은 이렇게 완성됐다. 붓을 놓고 고갱은 혼자 산 속에 들어가 자살을 기도했다. 미수에 그쳐 심장마비로 숨질 때까지 5년을 더 살았다.

 보스턴미술관 소장의 이 그림이 서울에 왔다. ‘설교 후의 환상’(1888), ‘황색 그리스도’(1889) 등 주요작이 국내 첫 고갱전을 위해 한데 모였다. 서울시립미술관의 ‘낙원을 그린 화가-고갱’전이다. 전세계 30여 주요 미술관서 보험평가액 1조 5000억원 상당 작품 60여 점이 온다고 개막 전부터 화제였다. 서순주 커미셔너는 “고갱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지고 싶어했던 19세기 마지막 인상주의자인 동시에, 인상주의 시대를 마감한 최초의 근대화가”라고 설명했다.

 전시엔 우여곡절이 있었다. 서울시립미술관 김홍희 관장은 지난해 취임하면서 “기획사의 대관 전시를 열지 않겠다”고 천명했다. 서울시립미술관이나 예술의전당 등 ‘목 좋은 미술관’들이 이벤트 기획사의 블록버스터전에 전시장을 빌려주고 대관료를 받는 데 집중, ‘복덕방 장사’나 하고 있다는 비판을 의식한 탓이다.

 서구 명화전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이런 기회가 아니라면 저 대작들을 어떻게 실견(實見)하겠는가. 다만 정규 학예인력들이 대관 심사에만 골몰할 뿐 의미 있는 전시를 꾸리지 못하는 미술관의 역량 부족은 비판받을 만하며, 관장이 이 같은 문제를 자각하고 있음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고갱전은 결국 또 다른 외부 기획자가 현대미술가들로 연계 전시를 꾸리는 걸로 갈등을 봉합했다. 전시 마지막에 양푸동·노재운 등의 작품이 맥락이 닿지 않은 채 설치돼 있는 이유다. 대관에 그칠 게 아니라 기획에 참여해야겠다는 미술관측의 고민이 읽히지만, 억지스럽다.

 우리만큼이나 서구 명화전을 선호하는 일본은 어떨까. 올 봄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에서는 프랜시스 베이컨(1909~92) 사후 첫 아시아 회고전이 열렸다. 국내 미술인들 사이에서도 화제를 모았던 이 전시의 말미에는 소규모 자료전이 마련돼 있었다. 베이컨이 활약하던 시기, 일본에서는 그의 작품이 어떻게 수용됐는가를 다뤘다. 미술 잡지 기사와 연표, 그리고 ‘몸의 정치학’에 천착했던 베이컨의 예술이 일본의 현대 무용과 어떻게 연관됐는지 보여주는 공연 영상도 함께였다. 미술관이 ‘아시아 최초’ ‘단독’ 따위 수사에 기대지 않고 ‘왜 우리에게 베이컨인가’ 하는 기본 전제부터 붙든 덕분이다. 미술관은 미술현상에 대한 역사적 인증이 일어나는 곳이니까.

 그렇다면 왜 지금 서울에서 고갱일까. 전시를 봐선 알기 어렵다. 고민이 부족한 탓이다. 아직도 이름값 하는 명작만 들여오면 관객이 넘쳐나리라고 생각하는 걸까.

권근영 기자

★ 5개 만점, ☆는 ★의 반 개

★★★ (김노암 문화역서울 284 예술감독):

문명에서 야생으로…. 낙원에서 보낸 화가의 이야기. 원본의 감동 속에 망각하는 것들, 세속의 구경거리가 된 명화 관람의 현실을 보여준다.

★★★ (윤범모 가천대 교수): 고갱의 대표작을 어렵사리 가져왔음에도, 현역 미술가들의 작품을 맥락도 없이 혼재시킨 바람에 양쪽을 다 죽이는 불온한 자리가 됐다.

★★★☆ (권근영 기자): 이제는 고민 좀 하자. 미술관 대관 블록버스터 전시란 어떠해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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