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웨스트할리우드 동성 결혼식을 가다

미주중앙

입력

두 손을 맞잡은 동성 커플이 웨스트할리우드 시의원의 성혼선언에 감격하며 활짝 웃고 있다. 김상진 기자

제나와 앤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부부가 아닌, 연인으로서만 보내야 했던 30년의 시간이 떠올랐는지 연신 하얗게 센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신혼부부가 된 그들은 "오늘은 영원히 잊지 못할, 너무도 좋은 날이다. 아무한테나 감사하다고 절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라며 두 손을 꼭 붙잡았다.

낮 최고기온이 90도에 육박한 2일 오후, 웨스트할리우드 파크는 동성 커플들의 혼인서약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펑퍼짐한 폴로 셔츠 차림의 커플도, '반지' 따윈 필요 없다는 신세대 커플도 어두운 조명 아래, 얼굴을 붉혔다. 들릴 듯 말듯 흐르는 캐논 변주곡과 하얀 백합, 시 관계자들이 전부인 조그마한 강당은 '부부'라는 단어에 숨을 죽였다. 부부가 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3분 남짓. 시끄럽게 행복을 떠드는 커플은 없었다. 오랫동안 이날만을 기다려온 커플들은 먹먹한 표정으로 세상에서 가장 길고 엄숙한 의식을 치렀다.

주례를 맡은 존 하일맨 웨스트할리우드 시의원은 "오늘 이곳에서 93세 남성이 53년동안 함께 해 온 파트너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보는 내내 행복하고, 기쁜 마음만이 가득했다"며 "우리 손으로 만들어낸 '동성결혼'이라는 역사가 자랑스럽다"고 소감을 전했다. 사실 이날 6시간 동안 치러진 무료 결혼식은 예정에 없던 행사였다.

연방대법원의 '결혼보호법(DOMA)' 위헌 결정 이후, 일일 무료 결혼식(1일)을 계획했던 웨스트할리우드 시가 "하루만 더 늘려달라"는 주민들의 열렬한 요청에 못 이겨 연장을 결정한 것. 시 측은 동성결혼에 동참한다는 의미로 무료 셔틀·주차서비스 등을 제공했다.

오후 3시35분, 혼인서약 후에도 쉽사리 식장을 떠나지 못하고 서성거리던 데이비드 코언(42)은 "결혼 증명서를 받을 때와는 사뭇 다른 감정이라 진정이 필요하다"며 수줍게 웃었다. 이미 파트너와 캐나다에서 혼인신고를 마친 그는 2009년 가주로 이사, 이날을 위해 결혼식을 하루 이틀 미뤄왔다고 했다. 그는 "내가 태어난 곳에서, 드디어 21년 동안 사랑해온 남자의 가족이 됐다. 내 생전에 이런 감격스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곤 꿈에도 몰랐다"고 말했다.

너무 긴장해 혼인서약을 제대로 따라 할 수 없었다는 대니얼 벨라스케스(33)는 결혼의 무게를 실감하게 됐다는 말로 소감을 전했다. 감사와 기쁨, 안도감이 섞인 여유있는 표정. 특히, 그는 지난 12년간 그저 '남자친구'였던 사람을 '남편'이란 이름으로 부를 수 있게 됐다는 사실에 감사하다고 했다.

식장이 문을 닫은 오후 4시, 그에게 동성결혼 금지법인 '주민발의안 8'의 지지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없느냐고 물었다. 여유로웠던 얼굴에 이내 섭섭한 감정이 묻어났다. "우리의 사랑을 짓밟지 말아요. 마음껏 사랑할 기회를 줘요. 우리도 같은 사람이잖아요."

구혜영 기자 hyku@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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