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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티시오픈은 어떤 대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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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오픈경기의 기원을 이룬 최고의 무대

1745년 3월 9일 리스 (Leith)의 골퍼 친목회 기록을 살펴보면 회장 명의로 세인트 앤드류스의 코스에서 은제 클럽을 걸고 연례적으로 경기를 벌일 것을 결정 하고 회원에게 통보 하는 서한이 있다.

그러나 경기는 1754년까지 실제로 개최 되지 않았다.

1754년 5월 14일 처음 열린 골프경기에 걸린 은제 클럽의 헤드에는 세인트 앤드류스(St. Andrews)라고 새겨져 있으며 이 해부터 우승 자에게 수여되는 트로피로 사용되었다.

이 때 처음으로 다음과 같은 룰이 제정되었다.

1. 대영 제국, 아일랜드의 귀족과 신사 및 일반 골퍼는 5쉴링의 참가금을 납입하고 서류에 서명만 하면 누구나 경기에 출전 할 수 있다.

2. 대진표는 각 플레이어 마다 번호를 부착해서 플레이어 자신들이 추첨하여 결정한다.

3. 번호 순으로 플레이하며 기록 계원이 스트로크를 기록한다.

4. 경기방식은 (매치 플레이) 11홀까지 플레이를 종료한 다음, 다시 11홀까지 플레이 한다.
기록계원이 각자의 성적을 엄격히 조사하여 가장 많은 홀을 이긴 골퍼가 우승 자가 된다. (각 플레이어는 다른 플레이어들과 모두 대전한다.)

5. 4크라운화 (1크라운은 5쉴링의 은화임) 가 우승 자에게 주어진다.

6. 또 우승 자에게 은제공과 은제 클럽이 수여되며 클럽은 다듬 해 경기가 개최되기 1개월 전까지는 반납 해야 한다.

7. 모든 분규는 당사자외의 전 참가 골퍼들이 해결한다.

8. 코치나 하인 및 바퀴 달린 물건, 말을 탄 사람, 개 등은 코스 내에 입장할 수 없다.

전설의 골프 부자, 톰 모리스

최초의 우승 자는 세인트 앤드류스의 상인 배일리 윌리암 랜대리 (Bailie William Landale) 라는 골퍼였다.
이상이 골프 사상 가장 오랜된 선수권 경기인 전영 오픈의 전신 이었다. 전영 오픈이 공식 적으로 시작된 것은 이로부터 106 년 후가 된다.

제 1회 경기가 열린 것은 1860년 이었다. 개최지는 프레스트윅 골프클럽 (Prestwick Golf Club) 이었으며 12홀을 3라운드하는 36홀 스트로크 플레이였다.
승자 에게는 챔피언 벨트가 주어 졌으며 3연승을 거두면 완전히 개인 소장품이 되었다.

영국 최초의 공식 챔피언은 뮤셀버그 출신 윌리 파크 (Willie Park) 였으며 그는 36홀, 174의 스코어를 기록 하였다.
영국 인들은 파 (Par) 라는 규정을 두지 않았 으므로 정확 하지는 않지만 당시 12홀은 요즈음의 기준에 의하면 파 49로 규정할 수 있다.
1회부터 11회까지 오픈 경기는 프레스트 윅 에서만 거행 됐으며 이 때를 '프레스트 윅 시대' 혹은 '모리스 (Moris) 시대' 라고 한다.
이 기간 동안 참가 플레이어는 8명 내지 17명 정도 였으며 모리스 부자가 대부분의 경기를 석권 하였다.
1860년 에서 1870년 사이에 올드 톰 모리스는 4 차례나 챔피언 벨트를 차지 했으며 영 톰 모리스는 아버지의 바톤을 이어 받아 3연승 (1868, 1869, 1870) 을 거두며 벨트를 영구히 차지 하게 되었다.

그는 13세부터 공식 경기에 참가 했으며 18세때에 (1868년) 전영 오픈에서 우승 한 명 골퍼 였다.
1870년 그의 기록은 10년 전 윌리 파크의 스코어보다 25 타 낮은 149 였다. 그러나 그는 1875 년 25 세 란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영 톰 모리스의 센세이셔널한 대승과 챔피언 벨트의 획득은 오픈을 주최하는 프로 모터 들에게 큰 충격 이었으며 1871 년 에는 경기가 중단 되기도 하였다.
1872 년 부터 세인트 앤드 류스와 프레스트 윅 및 뮤셀 버그의 세 코스에서 교대로 경기를 주최하게 되었다.
상은 은제 컵을 수여하되 3연승을 거둔 자는 영구 소유 한다는 규정은 삭제 하였다.

안식일에는 일절의 경기를 사절 시켜

전영 오픈의 초기에는 완전히 스코틀랜드인 들이 독무대를 형성하였다.
윌리 파크와 톰 모리스 부자 외 에도 세인트 앤드 류스 출신의 지미 앤더슨 (Jamie Andersen) 이 1877, 1878, 1879년에 3 연승을 기록 하였고 1880, 1881년에는 뮤셀 버그 출신 봅 헤르그선 (Bob Ferguson) 이 우승 하였다.
그러나 1890년 스코틀랜드 인의 신화는 깨어지고 최초로 잉글랜드 본토 출신 인 존 볼 (John Ball) 이 선수권을 차지 하였다.
그는 또한 전영 오픈 선수권 자가 된 최초의 아마추어 골퍼였다.

1891 년 다시 스코틀랜드 인이 우승 하였 으나 과거의 영광을 재현 시키기엔 무리였다.
1892 년 경기 규모는 72홀로 확장 되어 하루에 1라운드씩 이틀동안 (수, 목요일) 2라운드를 마치고 최종일 (금요일) 에 36홀을 플레이했으므로 기술 뿐 만이 아니라 강한 스테미너와 인내심이 필요 하였다.
토요일에는 연장전을 플레이 하였다. 영국에서는 안식일에 일절의 스포츠가 금지 되어 있었다.

처음 부터 영국인들은 전영 오픈이라 하지 않고 그냥 ' 오픈 선수권 경기' 라고 불렀다.
그들은 영국 선수권은 곧 세계 선수권 이라고 생각 하였다. 영국인 들의 이러한 의지는 1920년 이후에 미국 골프가 급성장을 보게 되면서 사라져 갔다.

1892 년 이후부터 오픈의 개최지는 로얄 세인트 조지 (Royal St. George) , 호래이크 (Hoylake) , 리쌈 (Lytham) , 세인트 안느 (St. Annes) 등 장소가 자주 바뀌었 지만 한가지 공통점은 언제나 해안 코스 (Links) 라는 점이다.
영국 인들은 변덕 스러운 날씨와 촘촘히 자란 잔디밭의 해안코스 야 말로 인간의 기량을 시험하는 최적의 장소라고 생각 하였다.

대우받지 못한 프로골퍼

이 당시 프로 골퍼들은 술 만을 좋아하는 주정뱅이로 취급받았으며 새인 들에게 좋은 호평을 듣지 못하였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그들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고 있다.

'프로 골퍼 들이란 우리 모두가 잘 알다 시피 무용지물 들이다. 시즌이 되면 낮 동안 돈을 벌어 밤에는 탕진해 버리는 족속 들이다. 그들은 골프와 위스키 외엔 모른다. 남들이 휴식을 취하는 시간에 일을 한다. 그것도 주머니가 텅 비어있을 때 뿐이다. 그라운드만 플레이하면 7실링 6펜스의 돈을 벌지만 예약을 받지 못하면 캐디 노릇을 한다. 간혹 내기에 돈을 걸어 수지 맞기도 하는데 언제나 양편에 모두 돈을 잃고 만다.'

프로 골퍼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J.H. 테일러 (J. H. Taylor) 와 제임스 브레이드 (James Braid) , 헤리 바든 (Harry Vardon) 이었다.
이들 3인은 프로 골퍼의 가치를 초라한 식객에서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신분으로 끌어올렸다.
1860 ~ 1870년이 스코틀랜드, 프레스트 윅 시대라고 한다면 1872년 ~ 1891년은 잉글랜드 출신의 골퍼가 오픈에 대거 참가한 잉글랜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1892~1914년은 바든, 테일러, 보레이드 등 3강의 시대였다. 세계 1차대전 직전까지 22년 간 상기한 3인은 모두 16회 우승 하였다.

1921년 처음으로 조크 허치슨 (J. Ck. Hatchison 스코틀랜드 출생) 이 영국 오픈 선수권을 차지하였다.
다음해 1922 년 에도 미국의 명골퍼 윌터하겐의 손으로 패권이 넘어갔다. 이후부터 '전영 오픈'의 세력 판도는 바뀌어 미국이 주도권을 갖게 되었다.
1921~1933년 사이에 미국인이 우승 한 것은 모두 12회나 되었다. 그러나 윌터하겐과 보비존스가 급퇴하면서부터 미국 골퍼들의 득세는 한결 강화되었다.
한편 미국내에서는 막대한 상금이 걸린 토너먼트가 번번히 열렸으므로 상금이 불과 2,000 달러 내지 4,000 달러 밖에 되지 않는 '전영 오픈' 에 참가하려고 먼 여행을 하려는 골퍼가 없었다.
세계 골프의 주자로 군림하게 된 미국의 무관심으로 '전영 오픈'의 비중은 많이 상실 되었다.

1934~1960년 사이에 '전영 오픈'에 참가, 우승 한 미국인 골퍼는 샘 스니드 ('46년) 와 벤 호건 ('53년) 밖에 없었다.
헨리 코튼 (Henry Cotton) 이 1934 ~ 1948 년에 3 회 우승 한 후로 '전영 오픈' 은 백가쟁명의 시대가 되었다. 1949 ~ 1960 년 사이에 영연방의 골퍼들이 10회의 우승을 차지 하였다.

1950년대에 활약한 골퍼들은 남아연방의 보비 로크 (Bobby Rocke) 와 게리 플레이어 (Gary Player) , 호주의 피터 톰슨 (Peter Thomson) , 켈 네이글 (Kel Nagle) 등이 있었다.

다시 권위찾은 전영 오픈

1960년에 들어서면서 프로골프계의 세계 제1인자를 서로 자부하는 잭니클라우스와 아놀드파머등 미국의 명골퍼들이 다시 '전영 오픈'에 참가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골퍼들이 '전영 오픈'을 세계에서 가장 오랜 전통을 갖고 가장 존경받는 경기로서 새삼 인식한 것이다.

[기사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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