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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문의 나라'가 살아가는 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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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무협지를 몰래 읽다가 선생님의 일격을 맞아본 사람들은 알고 있다. 무거운 삶이 상상력의 공간에서는 어떻게 가볍게 부상하는지를. 육체가 오뉴월 감자씨알처럼 근질거리고 빗속 모란꽃처럼 꿈이 영글던 청소년 시절을 견디게 한 힘은 담임선생의 일제 소탕전에 압수되고야 말았던 불온서적들이었다. 성장통과 미지의 호기심을 겨우 진정시켰던 영웅적 판타지, 유교적 훈화의 공적(公敵)이었던 전기적(傳奇的) 상상력의 불씨들이 새삼 아쉬워지는 것은 중국이 벌인 세계적 우주쇼 때문이다.

 35세의 여성우주인 왕야핑(王亞平)이 340㎞ 상공에서 행한 물방울 실험이 별것 아닐 수도 있다. 그보다, 중국 청소년 6000만 명을 일시에 판타지 공간으로 끌고 갔고, 그곳에 미래 과학강국을 건설할 청소년의 꿈을 예약했다는 데 주목하고 싶은 것이다. 꿈과 판타지는 과학을 키우는 생장호르몬이다. 불온한 꿈과 공상적 판타지가 모두 문학의 영역이라면, 문학은 과학을 부화시키는 인큐베이터일 것이다. ‘수사학의 대국’인 중국은 이런 맥락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과학은 문학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미국은 우주왕복선을 그냥 ‘발견(디스커버리)’으로 명명했지만, 중국은 ‘선저우(神舟)’로 불렀고 우주기지를 ‘톈궁(天宮)’으로 작명했다. ‘신묘한 비행선’이 닿는 곳이 ‘하늘 궁전’이라는 뜻인데, 중국인들은 그곳에 상제(上帝)가 살고 있다고 믿는다. 상제를 알현하러 가는 비행선에 왕야핑이 탑승했고, 그가 보여준 물방울의 기묘한 변형에서 상제의 손길을 느꼈을 것이다. 선저우를 타고 상제를 만나러 간다는 이 터무니없는 문학적 상상력을 실현하는 수단이 과학이다.

 세상을 바꾼 종교개혁도 이런 상상력으로 일어났다. 남달리 회의감이 많았던 마르틴 루터는 종탑 골방에서 끊임없이 되물었다. 신은 어디에 계신가? 어느 날, 계시가 왔다. 면죄부를 사기 위해 바치는 동전 소리가 아니라, 나의 믿음과 성서 속에 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신을 향한 여행’을 나에게로 오는 ‘신의 여행’으로 살짝 바꾼 이 문학적 상상력은 중세 유럽을 근대로 개벽시킨 원동력이었다. 왕야핑의 실험이 6000만 중국 청소년들에게 ‘상제의 실존’을 보여주었다면, 그건 중국과학의 개벽을 몰고올 것이다. 선저우를 타고 톈궁에 가서 상제를 만나는 이 중국적 우주시나리오 배경에 흐르는 문학의 힘이 그렇게 엄청나다는 얘기다.

 그런데 한국의 과학에는 문학이 없다. 지난 1월 30일, 발사에 성공한 우주선은 그냥 ‘나로호’였고 ‘나로과학위성’이었다. 아무런 설렘이 없다. 과학적 개념인 미국의 ‘디스커버리’는 이보다는 좀 나은 편이다. 미사일을 조폭처럼 다루는 북한도 발사체명을 ‘은하(銀河)’라고 붙일 줄은 안다. 작명만이 문제가 아니다. 처음 우주인으로 선정된 고산은 보안규정 위반이란 불명예를 쓰고 하차했다. 지구를 가볍게 이륙하는 우주인에게도 지구의 현실적 규정이 무거운 중력처럼 적용되는 슬픈 광경을 목격한 청소년은 무슨 생각을 할까? 러시아 우주선 소유스 12호를 타고 10일간 우주정거장에 머물렀던 한국 최초의 우주인 이소연은 지금 과학인의 꿈을 접고 MBA 과정을 밟고 있다. 과학에서 비즈니스로 망명하기까지 심경은 복잡했을 것이다. 그가 꿈을 접는 마당에 꿈을 꿀 자 누군가? 문학의 빈곤, 공상적 판타지에 득실의 경제학을 적용하는 냉정한 마인드로는 과학한국의 미래는 없다.

 조선은 세계 최고로 문(文)을 숭상했던 나라였고, 선비라면 누구나 문집을 냈던 문학강국이었다. 문이 인격이자 실존이었던 나라의 대통령이 ‘상상력의 대국’을 방문했다. ‘항우가 산을 뽑고(力拔山)’‘한 번 날갯짓에 9만 리를 나는 대붕(大鵬)’의 수사학에 그래도 함몰되지 않은 것은 대통령의 탁월한 중국어 실력도 그렇지만 진정성을 소중히 여겼던 한국인의 문학적 유전자 덕분이다. 방문길을 심신지려(心信之旅·신뢰를 쌓는 여행)라 불렀고, 사업동반자가 되려면 먼저 친구가 돼야 한다(先做朋友, 後做生意)는 명구절도 남겼다. 성과도 만만치 않다. 핵 문제와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동북아 안보협력망도 포괄적 합의를 보았다. 중국 주석 시진핑은 한·중 관계가 한 단계 발전했음을 축하하는 서예작품을 선물했다. 당나라 왕지환이 쓴 시로, ‘욕궁천리목, 갱상일층루(欲窮千里目, 更上一層樓·천리를 보려고 누각 한 층을 더 오르네)’라 쓰여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칭화대 연설에서 “중국의 미래는 한국의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고 화답했는데, 기왕에 그럴 것, 베이징 공항에서 이별시 한 수 남기고 왔으면 어땠을까. 문학적 상상력으로 역사적·전략적 거리를 일괄 용해하는 것이 ‘문의 나라’가 살아온 방식 아니던가.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