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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삼류 혈투, 그만들 하시지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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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농사꾼에서 날렵한 정보시민으로 변신한 그 아찔한 세월을 숨차게 건너온 사람이라면 소설 한 권 분량 얘기는 족히 갖고 있다. 그런 우리들에게 예·아니오 문제를 내면 애들 말로 대박 짜증 난다. 몇 년 전 행안부에서 보낸 자기검증서를 재미 삼아 풀어봤는데 첫 문제부터 걸렸다. “지방에 토지를 구입한 적이 있나요?” “귀하는 위장전입을 한 적이 있나요?” 거기서 중단해야 했다. 답은 예·아니오였는데, 더 했다간 인격파탄이었다. 지방살이 10여 년에 서울 안착까지 속사정은 소설 두 권 분량이다. 20년 전, 농민이 되려고 면사무소에 갔다가 퇴짜를 맞았다. 교수는 안 된단다. 딸을 강북학교로 보내려고 학교 앞 문방구에 잠입했다. 샌디에이고 대학 초빙교수 시절 가족이 모두 미국에 있었는데, 그래도 위법이다.

 요 몇 달, 정치권이 낸 단답형 문제를 푸느라 국민들은 왕짜증이다. 안 그래도 할 일이 태산인데 사생결단 혈투에 올인하고 있으니 우리 정치가 삼류(三流)인 것은 확실한 모양이다. 외국에서 들려오는 숨통이 확 트이는 얘기들, 뭐 그런 건 없을까? 영국의 영란은행은 캐나다의 실력파 마크 카니(M. Carney)를 신임 총재로 모셔왔다. 317년 영란은행 역사에 없는 초유의 결단이었다. 오랜 긴축정책 여파로 0.3% 저성장에 허덕이는 영국이 자존심을 버리고 통화주의 마술사를 초빙한 것이다. 빈사 직전의 일본항공을 살려낸 사람은 81세의 노장 이나모리 가즈오(稻盛和夫) 교세라 명예회장이었다. 2010년 일본 정부는 그를 설득해 회생작업을 맡겼고 결과는 3년 만의 흑자전환이었다. ‘경영의 신’이 내건 목표 ‘매출 최대화, 비용 최소화’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눈치 볼 일은 없었다.

 경제민주화도 좋은데 경제정책 기조를 확 바꿀 실력파는 어디 없을까? 수십 개의 공기업에 정권 공신들을 내리꽂는 것 말고 관료들 성화에도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소신파 민간 CEO들을 공채하면 안 될까? 창조경제, 과학기술 R&D에 140조원을 쏟아붓는 것도 필요하지만, 중견기업들 일제 세무조사로 몸살 나게 할 일은 뭔가? 시간제 일자리 92만 개를 창출한다는 정부의 당찬 공언이 아득하게만 들리는데, 공장 기계를 24시간 윙윙 돌리게 만들 용한 구원투수를 물색하는 게 더 급하지 않을까?

 이런 문제에 머리 맞대도 될동말동한 판국에 국회 개원과 동시에 맞붙은 격투기 스토리가 가관이었다. 성이 난 야당이 포문을 열었다. ‘국정원이 댓글 달았잖아!’ 그랬더니 다급해진 여당이 꾀를 냈다. ‘NLL 없애자고 그랬지?’ 이건 단답형이 아니라 동문서답형이다. 정치권의 소통은 늘 이랬다. 무슨 계산을 했는지 남재준 원장이 답안지를 ‘깠다’.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했는데 해석이 엇갈렸다. 원래 말[言]을 글[文]로 옮기면 오독 가능성이 높아진다. 말에 얹힌 감성과 표정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결국 공방전은 실사팀 국정원 파견으로 번졌는데, 그사이 감사원은 하나를 또 터뜨렸다. ‘4대강은 대운하였다!’

 정말 대박 짜증이다. 물폭탄에 폭염이 대기한 올여름 국민 불쾌지수를 최고로 밀어 올릴 저 쟁단들의 자초지종을 ‘그것이 알고 싶다’식으로 엮으면 족히 두 시간 방송 분량은 될 거다. 그런데 저런 소모적 사건들로 머리 쥐어짤 이유가 없기에 자기검증서 같은 간단명료한 방식으로 단순무지하게 답하면 이렇다. ‘국정원이 댓글 달았지?’는 ‘예’다. ‘NLL 없애자고 그랬지?’는 ‘아니오’다. 국정원장의 대화록 공개는, ‘부적절했다’. 그리고 ‘4대강은 대운하였지?’는 ‘사람 더 불러야 돼!’다. 강물 따라 굽이굽이 수십 킬로 수심 재느라 5년 다 갈 거다. 아무튼 답은 간단명료하지 않은가? 한국 경제가 고물 잠수함처럼 가라앉는 마당에 이렇게 넘어가면 안 될까. 단, 조건이 있다. 잘못한 쪽에서 사과하면 된다. 서로 진정으로 사과하지 않으니 ‘귀태!’ 같은 기상천외의 저질 발언이 나온다. 한국어에 저런 말이 있었던가?

 미국에 의료분쟁 해결사로 정평이 난 ‘소리 웍스 연합(Sorry Works! Coalition)’이란 시민단체가 있다. 그 단체는 의외로 간단한 팁을 고안했다. ‘진실 말하기’, 그냥 잘못을 시인하는 것이다. 의사가 실수를 인정했더니 환자의 소송 건수가 40%나 줄었다는 것이다. 진실을 말하면 삼류(三流) 혈투는 금시 끝난다.

 과거 들추기 격투기에 한국 정치가 단연 세계 으뜸일 거다. ‘정통성 부정’을 통해 ‘정통성 쌓기’에 재미를 봤기 때문인데 현 정권에서도 두 정당이 예외는 아닌 모양이다. 우리가 미래를 진지하게 논의한 적이 있었던가? 미래를 초청해야 현재의 갈등이 풀리는 법, 우리가 초청할 미래는 어디 있는가?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