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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권좌」의 퇴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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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드골」 「프랑스」 대통령은 강력 집권 11년만에 드디어 권좌에서 슬픈 종막을 맞았다. 2차대전의 영웅,「알제리」 전쟁의 종막으로 누란의 위기에 처한 「프랑스」를 구하여「프랑스」 의 위신을 크게 선양하고 바야흐로 위대한 「프랑스」의 건설을 꿈꾸던 그는 20년동안 그를 지지해온 바로 「프랑스」 국민에의해 다시 권력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2차대전 이후 어려운 여러 고비를 「프랑스」국민의 지지를 얻어 해결해 왔었다.
1년에 두번씩 정부가 바뀌어 국가위신의 추락은 물론 정치기구가 흔들리고 경제는 악화하고 「알제리」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프랑스」국민은 「드골」 장군을 구세주처럼 모셔왔다. 1958년 집권하자 「알제리」 7년전쟁을 끝냄으로써 오랫동안 상처 투성이였던 식민지 정책에 종막을 내렸다. 집권하자 그는 헌범을 개정하여 대통령의 권한과 정부의 권한을 강화하고 의회기능을 약화시킴으로써 제4공화국에서의 정국불안정을 지양하여 정치안정을 가져왔다. 정치의 안정과 함께 1959년1월1일「유럽」공동시장에 정식으로 가입, 강력한 통제경제 체제를 갖추어 경제발전에 전력을 다해왔다.
1963년 「거스카르·데스텔」경제상의 등용으로 연간 5∼6%의 계속적인 경제성장을 가져와 「프랑스」는 1965년부터는 국제수지면에서 흑자를 낳고 예산상의 적자를 말끔히 없애버리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드골」 대롱령은 위대한 「프랑스」의 영광을「모토」로 미·영·독등 서방국가와 외교면에 있어 커다란 차이를 보여왔다. 1964년 영국의 구공시가입을 반대하고 1966년에「나토」에서 탈퇴하여 미국과서독을 당황케 만들었다. 그는 제3세력 형성을 목적으로 신생아아국에서「이니시어티브」를 잡는한편 『「우랄」에서 대서양까지』의 대구주의 꿈을 실천하는데 전력을 다하여『미국으로부터의 독립』을 부르짖었다.
1959년 핵실험 실시로 완전히 대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춘 「프랑스」는 미국으로부터의 경제적 독립, 동구와의 유대 강화를 부르짖은 나머지 국내경제에 소홀하게 되었다. 1966년부터 경제성장의 둔화와 노동임금의 동결등으로 국내의 불만이 축적되다가 작년 5, 6월의 학생 「데모」및 1천만 노동자의 파업이 초래된 것이다.
「드골」 은 세계의 여론과 경제원칙을 무시하고 「프랑」화 평가절하를 하지않고 버티어왔다. 그러나 국가경제는 5, 6월 위기이후 계속 악화하여 국민들은 현정부를 부인하게 된 것이다, 「드골」 대통령은 지난 3월 자신의 오랫동안의 꿈인「제3의 도」를 이룩한다는 원대한 계획아래 지방행정을 개혁하고 상원을 개편하는 헌법개정을 위한 국민투자 실시를 제의한 것이다. 그런데 많은 「프랑스」 국민들은 그렇지 않아도 유명무실한 상원으로부터 입법권마저 뺏어 강력한 정부와 절대 다수를 확보한 하원과 의정부·의회 결탁정치를 반대해 왔으며 국민투표서 제안된 대통령 유고시의 대통령 직무대리를 상원의장 대신 수상에게 넘겨주자는데 반발해 왔었다. <장덕상 파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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