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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행에 부푼 김 시스터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몇년 전부터 모국을 찾겠다고 벼르던 김 「시스터즈」 3자매가 드디어 오는 11월께 한국에 온다. 「김 시스터즈」가 미국에 발을 디딘지 15년. 이제 이들은 미국의 세계적인 여성 「보컬」 『스프림스』와 맞먹을 만큼 크게 자랐다.
6·25동란 때 공산군에게 아버지 (김해송씨)를 뺏기고, 8명의 어린 형제들을 돌보는 어머니 (이난영)를 돕기 위해 10살을 갓 넘는 나이로 미군 위안 공연 무대에 섰던 「김 시스터즈」는 이제 「라스베이거스」에서 「뉴요크」에 이르는 미국의 최고급 「나이트·클럽」에서 연주하게 됐고 미국 전역에 방송되는 「에드·설리번·쇼」에 23번이나 출연한 기록을 갖고 있다.
어린 시절 한국의 미8군 「쇼」에서 「돈 대신 초컬리트」를 받았던 「김 시스터즈」. 53년 미국에 첫발을 딛고, 「라스베이거스」의 「선더버드·호텔」 무대에서 주급 5백「달러」를 받았던 그들은 이제 「스타더스트·호텔」과 「디저트·인」에서 주 1만5천「달러」를 받고 일하게 됐으며 「푸에르토리코」의 「산환」에서 「셀라돈·클럽」을 경영하기로 한다.

<엄마 조언 따라>
영어를 말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던 「김 시스터즈」가 소리로만 배운 「버트밀크·스카이」를 미군 부대에서 불렀을 때 『그들은 우리 노래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우리를 좋아했지요』하고 「김 시스터즈」의 큰언니인 숙자 양 (29)은 최근 「더·버지니언·파일럿」지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우리는 하루에 8시간씩 연습하고, 밤마다 다섯번의 「쇼」를 해냈어요.』
「앤드루·시스터즈」의 낡은 음반으로 노래를 배워, 「앤드루」류의 「하머니」와 귀여운 재롱으로 인기를 얻었던 이들은 『미국에는 「앤드루·시스터즈」와 「맥과이어·시스터즈」가 인기를 얻고 있으니 「김 시스터즈」는 이들과는 달라야 할 것』이라는 어머니의 조언에 따라 악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67년 모두 결혼>
숙자는 「테너·색스」를 애자는 「드럼」을, 민자는 「앨토·색스」를 배웠는데 이들은 지금 「색서폰」 「클라리넷」 「트롬본」 「바이얼린」 「실로폰」 등 28개의 악기를 자유로이 구사한다. 『어머니는 또 성공하려면 남자를 멀리해야 한다고 해서 우리는 23살까지 「메이트」를 하지 않았어요.』
67년에 「김 시스터즈」 자매들은 각각 결혼했다. 제일 먼저 둘째 애자 양이 가수 「프랭크·패스터」와 결혼한 뒤, 세째 민자 양이 「밴드」의 「하프」 연주자이며 작곡도 하는 「토미·비그」와, 그리고 마지막으로 첫째인 숙자 양이 실업가 「존·보니파지오」와 결혼했다.
『우리는 휴가도 없이 8년 동안 일하고 일하고 일했어요. 우리는 「데이트」할 시간도 없었어요. 우리는 어디나 함께 갔고 똑같이 옷을 해입고, 세쌍 결혼을 꿈꿨었지요.』

<월남서 공연도>
「김 시스터즈」는 미국 사람들이 이름을 잘 외지 못하기 때문에, 숙자는 「수우」로, 민자는 「미아」로 이름을 고쳤는데, 애자만은 잘 기억되는 이름이기 때문에 「애자」로 그대로 슨다.
「김 시스터즈」는 그동안 「뉴요크」의 「월더프」와 「워싱턴」의 「쇼햄」 「시카고」의 「팔머·하우스」와 「댈러스」의 「힐튼·호텔」을 순회했으며, 66년 겨울에는 월남 「캄란」의 가설 무대에서 「보브·호프」와 함께 전쟁에 시달리는 미군 장병들을 위문했다.

<유럽서도 절찬>
그들은 또 66년 「유럽」 공연에 나서, 「로마」 「파리」 「베니스」 「마드리드」 「뮌헨」 「런던」을 순회했으며 「몽테카를로」에서는 「그레이스」 「모나코」 왕비를 위해 특별 공연을 하기도 했다.
전형적인 동양인이면서 전형적인 미국의 가요를 부르는 「김 시스터즈」는 관객을 즐겁게 해주려는 성실한 열의, 「버라이어티」와 「하머니」를 갖춘 뛰어난 연주로 많은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우리는 주월미군을 위문하기 위해 오는 12월 「보브·호프」와 함께 월남에 갈겁니다. 그때는 고국에도 갈 수 있겠지요. 고향에 가는 때가 기다려지는 군요.』
「김 시스터즈」은 15년 동안 고국을 떠나 있었다. 그들은 지금 고국을 그리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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