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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이상재 선생|이관구<편협초대 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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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지난 4월7일은 제13회 「신문의 날」이며 우리나라 신문의 원조인 「독립신문」 창간 73주년인 날이다. 그런가 하면 42년 전 l927연의 이날은 우리의 위대한 지도자인 월남 이상재 선생의 사회장이 우리겨레의 무궁한 애한과 부진한 눈물 속에서 사상 초유라 할만큼 엄숙 성대하게 거행되던 날이었다.
당시 우리 신문들은 그의 서거를 호외로써 보도했는가 하면 그의 사회장에 관한 기사를 대서 특필하여 1면, 3면을 거의 메우다시피 하였다. 주먹같은 특호활자로 「전도비애의 사월칠일! 거인 월남선생 사회장의」라는 대제목 아래 「수운미만의 한성·오열하는 십만 군중」 「무궁한·부진루로 영구는 만년 유택에」(조선일보)라든지, 「칠백리 연도(서울에서 서천 선영까지)에 애도 단체 백이십여」(동아일보)등등, 망국한이 서린 거족적인 애도로 하여 적에 대해서는 최대급의 심통한 시위를 벌인 것이었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그 뒤로 오늘날까지 이러한 성대한 사회장을 보아 온 일이 없다.
오늘에 우리가 기념하는 민주언론의 창시자인 「독립신문」의 발간은 서재필 박사의 공업으로 대표되어 있지만, 「독립신문」은 「독립협회」의 기관지의 성격을 띤 것이며 월남선생은 서 박사와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또 부회장의 요직에 있었던 만큼 역시 「독립신문」의 동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신문의 경영이나 평론에 직접 기여한 바는 없었다. 또 l924년 선생의 75세 때에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하여 3연간을 지내는 동안에도 역시 신문인으로서가 아니고 민족의 지도자이며 그 정신적 지주로서 추대되었을 뿐이었다. 돌아가시던 해 1927년2월15일에 민족단일전선인 신간회가 결성되자 그 초대회장으로 피임하면서 조선일보 사장직을 내놓았는데 노환으로 인해 그 익월 29일에 파란많은 일생을 마치었다.
조선일보사장으로 계시던 1926연에는 전국신문기자대회가 열렸는데 당시의 젊은 기자들 가운데는 사회주의자들이 많이 침투해 있었다. 일정 당시 우리나라 사회주의 운동의 절정기가 바로 그때였으며 따라서 국제성을 띤 조선공산당을 결성하려는 지하활동이 매우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와 동시에 일제 당국의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탄압은 대단하였다.
26년에는 「조선노동자총동맹」 「조선농민총동맹」 「조선청년총동맹」의 집회를 금지하였고, 27연에는 제1차 조선공산당에 관련된 백여 명을 검거하는 등 가열한 탄압이 계속되었다. 26연의 기자대회도 언론·집회의 자유를 부르짖기 위하여 열린 것이었으나 개회 벽두부터 장내의 분위기가 험악하였다. 민족운동진영 대 사회주의운동진영의 대립, 그리고 후자의 진용 속에도 「북풍」 「화요」 「서울」 「ML」등 파벌들의 주도권 쟁탈활동으로 빚어진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누가 사회자로 등단하든지간에 야유와 욕설을 퍼부어 쫓아냈기 때문에 회의를 진행할 수 없는 판이었다. 게다가 「미와」라는 독종의 임검경부가 단상뒷자리에서 발언의 중지와 집회의 해산을 외칠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월남선생을 부축하여 사회석에 모시게 되니 장내는 대번에 조용해져 일사천리로 의사가 진행되었다. 외유 내강한 그의 인격적 권위는 어떠한 난국이라도 수월하게 타개해 나간 것이었다.
그 당시에 일정 당국은 사회주의 진형을 탄압하기 위한 분열정책으로서 민족진영에 대한 탄압의 고삐를 늦추었기 때문에 신간회의 결성을 묵허한 것이며 민족단일선운동을 표방하고 나온 것도 우리의 사회사정이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월남선생같은 위대한 지도자를 회장으로 모셨으나, 취임하고 난 바로 그 익월에 그만 별세하신 것은 우리 사회는 물론 신간회의 명운에 큰 영향을 끼쳐 유한이 크다. 「미와」경부의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선생의 병환이 심중하셨을 때 그는 검시 겸 문병차 선생을 방문하였다.
그때 선생은 「미와」를 보고 『이 사람아 기어이 죽는데까지 따라 올 작정이냐』고 웃으면서 말씀하여 돌려보냈다.
선생이 세상에 문자로 남긴 것은 많지 않다. 내가 기억하는 시 한수는 『만사무구원리외 일심자재불언중』(만사는 원리 밖에서 찾을 수 없고 일심은 말없는 가운데 스스로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선생의 심통하고 대담한 일화와 해학은 수많이 전해지고 있는데, 모두가 애국애족의 지성으로 일관되어 있다. 웃음 가운데 흘러나오는 그 편언척구가 경세의 전언이요 불의에 대한 철퇴 아님이 없었다. 선생의 만년 약20연간은 YMCA의 총무로 있으면서 오직 자라나는 청년에게 구국의 희망을 걸고 그들을 훈도하는데 신심을 바치었다. 『청년더러 노인을 따라오라면 되느냐. 내 자신이 먼저 청년이 돼야지』하고 청년과 벗을 삼아 장기도 두고 쇠뿔놀이도 하면서 그들을 지도하였다. 불세출의 거인이요 구원의 청년인 월남선생에 관한 말씀을 좀더 소개하지 못하고 붓을 던짐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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