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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분수대

암행하는 기관은 일할 때 소리가 나지 않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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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역졸들이 다급한 소리로 어사 출두를 외치니 사람들이 두려워 피하는 것이 마치 바람이 불어 우박이 이리저리 흩어지는 것과 같았다.” “암행어사 출두요, 라고 한목소리로 크게 부르니 온 성이 솥물이 끓는 듯했다.”

 최근 번역 출간된 『서수일기(西繡日記)』(푸른역사)는 조선시대 암행어사의 위세를 실감나게 전한다. 『서수일기』는 1822년 순조의 명을 받아 평안남도 지방을 126일간 누빈 박래겸(1780~1842)의 생생한 민정시찰 기록이다. 암행인 만큼 다 떨어진 옷과 신발 차림이었고, 12명의 수행원도 몇 개 무리로 나뉘어 돌아다녔다. 당시 가짜 암행어사도 설쳤나 보다. 지방 포졸들이 일행을 가짜로 오인해 쇠사슬과 오랏줄로 포박하려는 순간 박래겸이 품속에서 마패를 꺼내 보이자 혼비백산해 나뒹구는 장면도 묘사돼 있다.

 암행어사라면 아무래도 영조 때의 박문수(1691~1756)가 유명하다. 몰래 지방을 돌며 탐관오리를 벌주고 억울한 사람을 구한 일화가 숱하게 전해 내려온다. 그러나 박문수는 네 차례 어사로 파견되기는 했지만, 신분을 감추는 암행어사로 활약한 적은 없다고 한다. 흉년에 굶주린 사람들을 보살피거나 양역(良役)을 바로잡을 목적으로 파견된 ‘별견어사(別遣御史)’였다는 것이다. 박문수가 암행어사의 대명사로 굳어지는 데는 소설 『박문수전』(1915년)이나 1970~80년대 위인전, TV 드라마의 영향이 컸다. 비록 암행어사는 아니었더라도 관료로서의 박문수는 ‘행정의 달인’이자 기개 넘치는 개혁가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심재우, ‘역사 속의 박문수와 암행어사로서의 형상화’). 박근혜 대통령이 박문수와 같은 고령 박씨로 방손(傍孫)에 해당한다는 점도 재미있다. 박 대통령의 18대조와 박문수의 11대조가 같은 사람이다.

 『서수일기』에는 한 할머니가 박래겸이 어사인 줄도 모르고 “암행어사 오신다는 소문에 관리·토호들이 몸 사리고 숨죽인다”며 “어사가 평생토록 두루 다니길 원한다. 그러면 힘없는 백성들도 살게 될 것”이라고 털어놓은 말이 기록돼 있다. 백성 입장에서 본 암행의 순기능이다. 현대라고 얼마나 다를까. 청와대나 총리실·감사원의 사정 담당자도 필요에 따라 암행을 한다. 분야가 다르지만 암행이 가장 필요한 조직은 아마 국가정보원일 것이다.

 사람들이 두려운 나머지 ‘마치 우박 흩어지듯’ 피하는 것처럼, 암행자는 대체로 힘이 세다. 따라서 조선의 어사든 대한민국 공무원이든 공정성을 의심받지 않게끔 처신해야 한다. 국정원이라면 특히 정치 관여 금지(국정원법 9조) 원칙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건 일할 때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이다.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로 온 나라가 시끄러운 게 과연 정상인지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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