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핵전력 못 줄인다" … 오바마 제안에 재뿌린 푸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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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임수 또는 전문성 부족, 둘 중 하나다.” “아주 먼 미래에나 가능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19일(현지시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추가 핵 감축 제안에 대해 러시아의 외교·안보 분야 고위 관계자들이 내놓은 반응이다. 오바마가 냉전 종식의 상징인 독일 베를린에서 야심 차게 내놓은 ‘평화의 화두’가 실제 성과로 이어지기는 어려울 거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러시아의 부정적 분위기는 이미 오바마의 연설 이전에 감지됐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연설 직전 주재한 군수산업 관련 회의에서 핵 전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반대 의사를 확실히 한 것이다. 푸틴은 회의에서 “러시아는 전략적 억지력의 균형이 깨지거나 우리 핵 전력의 효율성이 떨어지도록 놔둘 생각이 없다”며 “공중·우주방위 시스템 구축이야말로 러시아 군수산업의 핵심적인 방향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푸틴이 언급한 공중·우주방위 시스템에는 핵미사일과 미사일방어(MD) 시스템 구축 등도 포함돼 있다.

 사실 오바마는 17일 주요 8개국(G8) 정상회의 중 별도로 푸틴과 진행한 양자회담에서 이미 핵확산 방지 문제를 언급했다고 블룸버그통신은 20일 전했다. 푸틴이 오바마의 핵 감축 제안 계획을 알면서 미리 어깃장을 놓은 셈이다. 러시아의 군수산업 분야를 총괄하는 드미트리 로고진 부총리는 아예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기자들과 만나 “미국이 우리의 전략적 핵 잠재력을 저해할 능력을 키워가고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이 제안을 심각하게 고려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그가 불만을 표한 미국의 ‘저해 능력’은 바로 MD 시스템이다. 러시아는 유럽대륙에 MD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계획은 곧 러시아를 표적으로 삼는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로고진은 또 “군사력 경쟁이라는 것은 방어력을 강화하면 공격력도 강화하는 악순환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며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내놓는 제안은 공공연한 속임수 아니면 전문성이 부족한 것”이라고 일침을 놨다. 러시아 상원 외교위원회 위원장인 미하일 마르겔로프 역시 “MD 시스템 구축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이 제안은 아주 나중에야 논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러시아 이타르타스통신이 전했다.

 오바마의 제안은 러시아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역풍을 맞고 있다. 당장 의회에서 공화당을 중심으로 반대 기류가 조성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WP)는 20일 ‘푸틴에 대한 오바마의 오도된 믿음’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오바마는 G8 정상회담 내내 러시아 내 인권 문제나 시민단체 탄압 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며 “러시아와의 거래 성사를 위한 ‘전략적 침묵’은 현실적이지도, 실용적이지도 않다”고 꼬집었다.

 특히 푸틴이 표방하는 ‘강한 러시아’는 대미 유화책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지난해 외교정책 노선을 밝히며 두 국가의 협조를 상징하는 2009년 ‘관계 재설정’에 대해서는 언급하지도 않았다. 2010년 양국이 핵탄두 감축을 골자로 하는 새 전략무기감축협정(New START)을 체결할 때와는 상황이 다른 것이다. 푸틴의 강경노선은 국내에서의 입지 약화와도 무관하지 않다. 지난해 대선 부정선거에 항의하며 거리로 나섰던 시민들은 이제 푸틴의 퇴진을 촉구하는 반정부세력으로 ‘진화’했다. 이런 상황에서 서구에 양보하는 것은 나약함으로 비칠 수 있다는 것이 푸틴의 인식이다.

유지혜 기자

◆새 전략무기감축협정(New START)=미국과 러시아가 2010년 4월 체결한 무기 감축 협정. 2018년까지 양국이 보유한 전략적 핵탄두 수를 1550개까지, 핵무기 장착 폭격기 등을 700대까지 줄이는 것이 골자다. 2011년 2월 발효됐으며, 2021년 효력이 만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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