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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00억 쓰고도 참 희한한 개명 … 주민들도 깜깜! 답답!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경남 남해군 서면 서상리 입구엔 ‘서상마을’이란 표지석이 있다. 이곳의 지명은 서면의 윗마을이란 뜻(西上)에서 붙여졌다. 그러나 내년 서상리 일부 주민의 주소는 ‘스포츠로’로 바뀐다. 정부가 내년 1월부터 전국의 법정 주소를 도로명 새 주소로 단일화하기 때문이다. 도로명 새 주소는 예전처럼 ‘동·리+번지수’처럼 지번(地番)에 바탕을 두지 않고 도로의 이름과 건물 번호로 이뤄졌다. 단 부동산 등기부등본은 지번과 도로명 새 주소를 같이 쓴다. 내년 초 시행을 6개월가량 앞두고 있지만 서상리 정인숙 이장은 “도로명 새 주소에 대한 얘길 들어봤겠지만 ‘서상리 OO번지’ 대신 ‘스포츠로 OO’으로 쓴다는 걸 아는 주민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남해군은 2009년 4월 ‘스포츠 전지 훈련지로 각광받고 있는 남해 스포츠파크로 향하는 길임을 반영한다’는 취지로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 스포츠파크는 1999년 지어진 야구·축구 등 종목의 대표적인 겨울철 전지훈련 시설이다. 그렇다면 마을 주소에서 ‘서상’을 빼고 ‘스포츠’를 넣는 데 주민들은 반대하지 않았을까. 남해군 관계자는 “당시 담당자가 아니라서 정확히는 모른다”면서 “군 지명위원회에서 이름을 정한 뒤 이장회의에서 의견을 받아 확정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마을 주민은 “군청이 주민들에게 의사를 물어보지 않았다. 서상리라는 이름이 없어지는 걸 알았으면 찬성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내년 1월 도로명 새 주소 전면 시행을 앞두고 반대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새 주소가 정착될 때까지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는 데도 그에 대한 준비가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특히 도로명 새 주소가 옛날부터 내려온 지명을 사라지게 만든다는 측면에서 반발 기류가 강하다. 지난 3일 향토 지명을 연구해 온 박호석 전 농협대 교수는 정동채 전 문화부 장관 등 62명과 함께 “도로명 새 주소는 헌법 10조 인간의 존엄성·행복추구권이 보장하는 ‘자유롭게 전통문화를 누릴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한다”며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박 전 교수 등은 “지명은 단순한 땅이름이 아니라 조상 대대로 내려온 정신적 문화유산”이라며 “도로명 새 주소 체계엔 4000개 이상의 동(洞)·리(里) 등이 반영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서울 종로구의 경우 내년 72개 동명 중 59개(82%)가 없어진다. 종로구 동명은 가회동(가회방에서 유래) 등 조선왕조 행정구역 명칭이 내려오는 곳이 많다.

이에 앞서 한국땅이름학회(회장 배우리)는 지난 4월 학술 발표회를 열고 “큰길 위주의 도로명 새 주소가 시행되면 지명의 절대수가 없어진다”며 “주소에서 안 쓰기 시작하면 입에서 멀어져 점차 잊혀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학회의 배우리 회장은 “전면시행 중단을 촉구하는 국민 서명을 받을 예정”이라며 “뜻을 같이하는 다른 단체와 연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서울 중구~파주 문산이 같은 ‘통일로’ 주소
‘전통문화 훼손’이라는 명분 외에 도로명 새 주소의 효과를 의심하는 사람도 많다. 서울역 사거리에서 통일대교까지 47.6㎞에 이르는 통일로가 대표적 예다. 이 도로는 서울 중구~종로구~서대문구~은평구, 경기도 고양시~파주시 등 6개 기초 지방자치단체를 지나간다. 6개 지역의 일부 주민이 자신의 거주지와 별 상관없는 ‘통일로’라는 주소로 묶이는 것이다. 72년 3월 완공된 통일로는 민족통일의 의지를 반영해 이름이 붙여졌다. 지역 특성을 반영하지 않고 획일적으로 적용하다 보니 사람들 통행이 적은 산길에도 통일로가 붙여졌다. 반재원 훈민정음연구소 소장은 “얼마 전 홍제동 등산로에서 통일로가 적힌 도로명 주소를 따라가다 헤맨 적이 있다”고 말했다. 안전행정부의 ‘도로명 주소안내’ 시스템에 따르면 통일로2길(서울 중구)부터 통일로2033번길(경기도 파주시 문산읍)까지 일련 번호가 붙여졌다. 박병철(국문과) 서원대 교수는 “도로명 새 주소를 찬성한다”면서도 “도로에 일련번호를 매기면 편리성을 높일 순 있지만 방향성이나 특성을 무시하게 된다”고 지적했다.<오른쪽 그림 참조>

새 주소에 대해 “주소만 봐도 단번에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는 정부 설명이 무색한 경우도 있다. 테헤란로 바로 뒷건물 중 상당수는 ‘강남대로○○길’이라는 주소를 가지고 있다. 이면도로가 강남대로와 연결됐기 때문이다. 또 구불구불한 골목길이 많은 도심에선 ‘효창원로 12가길 O-O’(지번주소는 ‘원효로 4가 OO-O번지’)과 같이 지번주소 못잖게 복잡해질 수 있다.

새 주소의 경제적 효과도 부풀려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는 2010년 도로명 새 주소를 통해 ^외국인의 길 찾기 비용 3조1000억원 ^택배업체의 배달 시간·운행비 같은 물류비 1598억원 등 사회경제적 비용절감 효과만 연간 3조4000억원에 달한다고 내다봤다. 2006년엔 위치탐색 비용으로 연간 4조2283억원을 아낄 수 있다고 발표했다. 게다가 스마트폰·내비게이션을 통해 지번주소로도 손쉽게 찾아갈 수 있는 여건이 됐지만 경제성 분석에 이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다. ‘내비게이션 등 위치탐색 기기를 사용해도 지번주소에 비해 정확하게 알 수 있기 때문에 시간절감 편익은 발생할 것’으로 가정했기 때문이다.

정부가 도로명 새 주소 도입의 혜택을 가장 많이 본다고 밝힌 택배·물류업계에서도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 물류회사 관계자는 “도로명 새 주소 기반의 시스템을 새로 깔아야 하는데 이런 사실은 비용으로 계산되지 않은 것 같다. 또 도로명 새 주소에 익숙해지는 데 걸리는 시간이나 사회적 손실은 감안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안행부가 지난해 12월 통신사·카드사·온라인쇼핑몰·유통업체 등 165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보유하는 고객 주소를 도로명 주소로 바꿔 사용하는 업체는 한 곳도 없었다. 중소업체나 단체, 개인의 경우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택배회사도 답답하다. 한 관계자는 “도로 오른쪽엔 홀수 건물번호를, 왼쪽엔 짝수 건물번호를 부여한다는데 골목길이 두세 번 꺾어 들어가면 헷갈린다”고 덧붙였다.

아파트가 많은 대도시 지역에선 도로명 새 주소 효용성이 기대보다 높지 않을 수 있다. 자기 집 도로명 주소를 정확히 알고 있다고 응답한 사람은 전체 조사 대상 중 32.5%였다(안행부 지난해 12월 조사). 배우리 회장은 “우리 지명 문화에선 선(도로) 중심의 주소 개념은 낯설다”고 말했다.

남해군 서상리의 사례에서 보듯이 지역 주민의 의사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한국만 지번 주소 … 67년부터 개편 검토
정부의 입장은 더 이상 전면시행을 늦출 수 없다는 것이다. 안행부 측은 “96년부터 3800억원의 예산이 소요됐다. 정부도 지금까지 전면시행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어 몇 차례 유보했다”며 “지금 되돌리기엔 너무 진척됐다”고 말했다. 정부는 60년대부터 도로명 새 주소 도입을 추진해 왔다. 지번 방식은 1910년 일제가 토지수탈과 조세징수를 목적으로 만든 지적제도에 기반을 뒀다. 그러나 잦은 분할·합병으로 지번배열이 복잡해져 주소로서의 기능이 떨어졌다. 하나의 지번에 86채 건물이 있거나(서울 관악구 봉천동) 3000개 이상의 부번(附番)이 부여된 지번(서울 용산구 한강로)도 있다. 지번 주소를 사용하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지번방식을 고수했던 일본도 구역 중심의 주소제도로 개편했고, 중국·북한도 도로명 방식의 주소를 사용한다.

이에 따라 정부는 67년 선진국 주소표기 체제를 시찰한 뒤 70년 신주소 표시제도 사업을 검토했다. 80년엔 ‘신주소 표시제도 실시에 관한 규정’을 만들었다. 그러나 지번을 대체하는 게 시기상조라는 여론에 따라 시행이 보류됐다. 그러다 96년 청와대 국가경쟁력 강화 기획단은 ‘도로명 및 건물번호 부여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듬해인 97년 계획도시인 서울 강남구와 경기도 안양시에서 시범사업이 실시됐다. 2000년 전면도입 예정이었으나 실무상 어려움과 국민 혼란을 이유로 또 늦춰졌다. 2007년 도로명 주소법이 제정된 뒤 이명박 정부가 ‘국가경쟁력 강화’를 앞세워 2012년 전면도입을 추진했지만 이번에도 반발이 컸다. 특히 ‘특정 종교시설의 이름을 사용한 도로명이 부적절하다’는 지침에 따라 화계사길(→덕릉로)이나 보문사길(→지봉로) 등 불교 관련 도로명이 바뀌게 되면서 불교계가 불만을 표시했다. 결국 이들 도로명은 원상 회복됐다. 이 과정에서 전면 시행은 2014년 1월로 다시 미뤄졌다.

안행부의 송경주 주소정책과장은 “통신·카드·은행 등 민간 분야를 위해 지번주소를 도로명 새 주소로 일괄적으로 변경하는 프로그램을 보급할 예정”이라며 “도로명에 대한 주민의 이의가 타당하다고 판단되면 언제라도 고치겠다”고 말했다.

박호석 전 교수와 같은 반대론자도 도로명 새 주소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박 전 교수는 “지명을 충분히 살릴 수 있다면 도로명 새 주소 도입에 반대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배우리 회장은 “도로 중심으로 가더라도 일련번호 대신 골목길과 작은 길에 고유의 이름을 붙여주는 게 방법”이라고 말했다. 

이철재·노진호 기자, 이슬기 인턴기자 seaja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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