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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훈, 작년 대선 전 12차례 직원들에게 선거 개입 지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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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정부정책에 반대하거나 국정 수행에 비협조적인 사람과 단체 모두를 종북세력 내지 그 영향권에 있는 세력이라고 보는 그릇된 인식의 결과 국가정보원 직원들이 정치관여 및 선거개입 범죄에 이르게 했다.”

 서울중앙지검 이진한 2차장검사는 14일 국정원 의혹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검찰은 원세훈(62) 전 국정원장의 직접 지시에 따라 국정원 직원들이 국내 정치와 대선 등에 개입했다고 판단했다. 원 전 원장 공소장에는 “2008년 5월부터 4개월간 지속된 ‘광우병 촛불 사태’ 당시 행정안전부 장관으로서 반정부 선동에 잘 대처하지 못한 경험이 (그릇된 인식의) 바탕이 됐다”고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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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중앙지검 국정원 특별수사팀(팀장 윤석열)은 이날 정치·선거개입 활동을 한 혐의를 받은 전·현직 국정원 인사 6명 가운데 최고 책임자인 원 전 원장만 불구속 기소했다. 원 전 원장에겐 국정원법 9조(정치관여 금지), 공직선거법 85조(지위를 이용한 선거운동 금지) 등 혐의를 적용했다. 이종명 전 3차장, 민병주 전 심리정보국장, ‘국정원 여직원’ 김모씨 등 심리정보국 직원 3명, 외부 조력자 이모씨 등은 전원 기소유예했다.

 검찰에 따르면 원 전 원장은 취임 3개월 뒤인 2009년 5월 전(全) 부서장 회의에서 “국정원의 임무는 정부정책이 제대로 추진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업무를 공격적으로 수행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종북좌파’ 척결을 최우선 과제로 제시하고 심리전단을 독립 부서로 편제해 심리정보국으로 개편했다. 당시 2개이던 사이버팀을 2010년 10월 3개 팀으로, 총선과 대선을 앞둔 2012년 2월엔 4개 팀 70여 명으로 확대했다. 그러나 원 전 원장의 ‘지침’에 따라 국정원의 대북심리전 활동은 변질되기 시작했다. 북한 동조세력뿐 아니라 정부정책에 반대하는 정치인과 단체까지 ‘종북좌파’로 규정하면서였다.

 심리정보국 직원들은 세종시, 4대 강 사업, FTA, 제주 해군기지 등 주요 현안에 관해 정부 입장을 옹호하는 한편 재·보궐 선거, 총선, 대선 등 선거 때마다 인터넷 공간에서 조직적으로 야당 후보 반대 글을 올리고 찬반표시를 했다. 원 전 원장은 특히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는 “종북좌파가 제도권에 진입해 진보정권을 수립하려는 시도를 저지해야 한다”며 대선 개입 활동을 독려했다. 이처럼 국정원이 ‘종북좌파’로 규정한 후보자에 대해 낙선 목적의 선거운동을 했다는 게 검찰의 판단이다. 지난해 18대 대선에서도 민주통합당 문재인, 무소속 안철수 후보 등 야당 후보에 대한 낙선 목적 선거운동이 이뤄졌다고 봤다.

정치성 댓글 1900건 중 대선 위법 73건

 검찰은 정치토론이 활발한 15개 인터넷 사이트를 분석, 국정원이 올린 230건의 선거 관련 글과 1747건의 정치관여 글을 찾아냈다. 선거 관련 글 중 선거법 위반 혐의가 인정된 대선 관련 글은 73건이었고 2010년 지방선거(76건), 2011년 무상급식 주민투표(49건), 지난해 4·11 총선(32건) 글이 확인됐다. 73건은 민주당(문재인 후보 포함)의 정책이나 공약 반대 37건, 통합진보당(이정희 후보 포함) 반대 32건, 안철수 반대 4건이었다. 전체 찬반 표시(클릭) 5174건 중 특정 정당이나 후보 관련 찬반 클릭은 1314건(대선 관련 1281건)이 발견됐다.

 박형철 서울중앙지검 공공형사수사부장은 이날 “국정원 지시·보고체계의 정점에 있는 원 전 원장에게 법적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검찰은 원 전 원장의 지시가 공식체계에 따라 하달됐고 구체적 활동 내용도 원 전 원장에게 보고됐다고 판단했다.

원장만 기소 … 직원들은 기소유예

 실제로 검찰은 원 전 원장이 2009년 5월~지난해 9월 10여 차례 정치 관여 지시를 한 사실과 2010년 1월~지난해 대선 직전 12차례 선거 개입 지시를 한 사실을 밝혀냈다. 민병주 전 심리정보국장도 검찰 조사에서 “2012년 간부회의에서 ‘종북좌파들의 진보정권 수립 시도를 저지하라’고 지시한 것은 원 전 원장의 평소 발언을 그대로 옮긴 것이며 이런 취지는 반복적으로 직원들에게 전파, 축적돼 왔다”고 진술했다. 수사팀 관계자는 “지난해 말에서 올해 초 사이에 국정원 ID로 작성된 글 1700여 개가 삭제됐는데 증거를 인멸한 흔적으로 보인다”며 “국정원 본부 IP로 작성된 글들과 국정원 계정으로 보이는 트위터 글들도 추가로 발견돼 향후 공소사실에 포함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법무부와 수사팀은 원 전 원장에게 선거법 적용이 가능한지를 놓고 이견을 보여왔다. 결국 선거법을 적용하되 불구속 기소키로 절충했지만 수사 결과 발표 이후에도 논란은 가시지 않고 있다. 공소유지에 의문을 갖는 이들은 검찰이 찾아낸 비(非)정치·선거 관련 글(국가홍보, 북한 비판 등)이 3356건으로 훨씬 많고 공소시효가 남은 대선 관련 글은 극소수(73건)라는 점을 지적한다. 원 전 원장에게 적용된 선거법 85조 1항에 대해 유죄 판례가 거의 없다는 점도 논란거리다.

 한 선거법 전문 변호사는 “선거법 85조 1항으로 대법원에서 유죄 확정된 판례는 2010년 직원들에게 특정후보 지지를 요청했다가 기소돼 벌금 150만원이 선고된 이원형 전 한국관광공사 감사 건밖에 없다”며 “지위를 이용한 선거운동 여부가 앞으로 재판에서 논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수사팀은 “선거법 위반은 결과범이 아니라 목적범이어서 실제 선거에 미친 영향보다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가 있었는지가 중요하다”며 “원 전 원장이 구체적으로 선거 개입을 지시하고 보고받은 증거와 진술이 있는 만큼 공소유지는 가능할 것”이라고 반박했다.

김용판 전 청장, 수사 축소·왜곡 지시

 검찰은 지난해 ‘국정원 여직원 댓글사건’의 서울 수서경찰서 수사를 방해하고 축소·은폐를 지시한 혐의로 김용판(55) 전 서울지방경찰청장도 불구속 기소했다. 김 전 청장은 서울청이 국정원 여직원 김씨의 컴퓨터 분석 결과를 고의로 누락해 수서서에 보내고 증거분석 결과물 회신을 거부해 범죄혐의를 왜곡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은 이 같은 은폐·조작에 따라 수서서가 대선을 3일 앞둔 지난해 12월 16일 ‘대선 관련 글이 나오지 않았다”고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했고, 이는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라고 판단했다.

 검찰은 ‘국정원 여직원 댓글사건’ 폭로 과정에서 발생한 국정원 비밀 누설과 관련해 직원 정모씨와 전 직원 김모씨도 국정원법 위반 등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이동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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