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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도산의 산수르 찬탄하는 일화가 있다. 명종은 이퇴계가 소명에 응할 수 없음을 애석히 여기고 은밀히 화공을 시켜 도산의승경을 그려오게 했다. 그 산수화로 병풍을 두르고 명종은 평생의 울적함을 달랬다고 한다. 사모의 정을 산수화로 풀 수 있었음은 그 절경의 깊이를 짐작하게 한다.
도산와 아늑한 골짜기에 들어앉은 도산화당은 이조유학의 「메카], 퇴계는 이 초라한 화당의 한간방 완악재에 앉아 우주와 인문을 사색했다. 퇴계의 검소하고 경건한 생활은 이완악재의 꾸밈 새로도 알 수 있다. 사방 3미터나 뭘까 하는 좁디좁은 방에서 퇴계는 이조천하의 석학들과 철리를 토론했다.
『이처럼 좁디좁은 곳에서 어찌 견디시오. 』
영천군수 허시가 그곳을 찾아가 놀라서 울었다. 퇴계는 뜻밖의 질문을 받은 양으로 『오래 습관이 되어 오히려 편하오』하고 대답하더라는 것이다. 오늘의 후생들이 서재가 없어 공부를 못한다는 말은 낮 붉어질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퇴계가 젊은 시절에 서울로 과거를 보러 가는 길에 시중으로 따라가던 하인이 남의 밭에서 청대콩을 따다 넣고 밥을 지어 올렸더니 그는, 밥상에서 머리를 돌리더라는 일화가 남아있다.
서울에 우거하고 있을 때 이웃집, 밤나무 가지가 울타리를 넘어 퇴계의 마당에 늘어졌다. 밤이 열려 집안 뜰에 멀어지자 퇴계는 일일이 그것을 주워 이웃집으로 던졌다.
퇴계의 향리, 밥 한가운데로 길이 나 있었는데, 생인들이 곡식을 밟게 되므로 일꾼들이 길을 돌려놓았다. 퇴계는 사뭇 노한 얼굴로 『그대들은 먼 길가는 사람들의 피로와 시간은 생각지 않고 나의 집 곡식만 생각하느냐』고 꾸짖었다.
가뭄이든 해에 퇴계의 논엔 물이 점벙한데, 가난한 사람들의 논이 메마르자 그는 온통 논물을 그쪽으로 대게 했다. 『내 집엔 아직 그 사람들의 집보다는 많은 곡식이 있다』는 것이었다.
지난19일 건설부장관 앞으로 촌로들의 진정화가 날아들었다. 바로 도산화원이「댐]건설 계획에 의해 수몰될 위기에 놓여 있다는 사연이었다. 퇴계가 운명한지 3백98년 후인의 대접이 그의 허름한 화재하나 간수 못하는 것이라면 오늘의 인정은 너무 살벌하다. 도산화원은 달리 보존되는 길을 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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