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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같은 연구실서 한약 짓듯 뷰티 창조하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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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11일 경기도 용인의 아모레퍼시픽 ‘미지움’ 2층 연구시설에서 한방샴푸 ‘려’를 함께 개발하는 한의사 김지연 연구원(사진 오른쪽)과 샴푸 전문가인 배우리 연구원이 한방 원료와 추출액을 들어 보이고 있다. 보안을 위해 한방 원료가 든 통은 이름표가 붙은 쪽을 전부 뒤로 돌려놓은 뒤 촬영했다. [사진 아모레퍼시픽]
포르투갈 건축가 알바로 시자가 설계한 ‘미지움’은 연면적 2만6000㎡ 규모로 건립됐다.

11일 오후 4시30분 경기도 용인의 아모레퍼시픽 기술연구원 제2연구동인 미지움(Mizium) 2층 연구공간. 2010년 9월 건립 때부터 굳게 닫혔던 비밀의 문이 드디어 열렸다. 온통 흰색으로 탁 트인 공간이 펼쳐졌다. 연구원들이 놀란 표정으로 기자를 쳐다본다.

 “언론뿐 아니라 연구소 외부인에겐 처음 공개하는 겁니다. 회장님(서경배 아모레퍼시픽 대표) 외엔 저희 회사 임원분들도 못 들어오셨어요.”

 안내를 맡은 박종희 선임연구원이 “회장님 가족도 연구공간 출입문 앞까지만 볼 수 있었다”며 “언론사 취재는 전례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서인지 이날 취재에도 제약이 따랐다. 기자의 스마트폰 앞뒷면 카메라 위에 ‘촬영금지’라고 쓴 스티커를 붙여야 했다. 연구실 일부 공간은 볼 수 없고, 전경 사진도 찍을 수 없었다. 동행한 아모레퍼시픽 소속 사진담당 직원이 연구실 일부만 촬영했다.

 향료를 담아놓은 수백 개의 갈색병, 화장품·샴푸의 원료가 되는 한방재료가 가득한 통들과 원액 추출기계, 약탕기 등이 눈에 띄었다. 공간 구조도 독특했다. 2층과 3층에 연구원 200여 명의 책상과 실험대가 두 줄로 죽 늘어서 있다. 자기 책상에서 연구자료를 보다가 바로 옆으로 2~3m만 걸어가면 재료와 기기가 갖춰진 본인 전용 실험대에서 실험에 착수할 수 있는 식이다. ‘건축계의 노벨상’인 프리츠커상을 받은 포르투갈 건축가 알바로 시자가 설계에만 2년을 공들였다. 박 연구원은 “사무공간과 실험공간이 분리돼 있으면서도 아주 가깝게, 다른 팀과도 언제든지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게 해달라는 연구원들의 요청에 맞춰 수없이 설계 변경을 했다”고 말했다. 회의실도 벽면이 모두 투명해 회의하는 모습을 바깥에 있는 연구원들도 다 볼 수 있게 했다.

 배우리(29) 연구원이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들 것”이라며 미니 냉장고 크기의 ‘머리빗기 시험기(combing tester)’라는 독특한 기계를 보여준다. 가운데 사람 머리카락이 늘어져 있고 그 양 옆으로 머리빗 2개와 샤워기 2개가 설치됐다. 버튼을 누르자 빗이 머리카락을 빗어내는 동시에 노트북 화면에 초록색으로 그래프가 그려진다. 머리카락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 단위로 수치가 표시되는 것이다. 샴푸 중 젖은 상태에서도 머리 빗는 실험을 한다. 배 연구원은 “여성들은 머리를 감는 중간에도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빗기 때문”이라며 “숙련된 패널 10여 명이 주관적 평가도 수차례 하지만 모든 효능은 수치화할 수 있는 기계 측정을 병행해 실험한다”고 말했다. 자석을 이용한 정전기 발생 실험, 윤기 측정 실험, 젖은 상태에서 모발을 양방향으로 당겨 끊어보는 손상 실험 등에 사용하는 기계도 있다.

 연구원 중에는 한의사도 있다. 김지연(28) 연구원은 “『동의보감』 『본초강목』 등 한방의학서에서 필요한 효능이 있을 것 같은 약재를 선별한 다음 한약을 짓는 것처럼 배합 처방을 낸다”고 말했다. 기존 처방에만 기대지 않고 창조적인 발상도 한다. 샴푸시장 전체 1위인 한방샴푸 ‘려’의 탈모방지 성분인 백자인(측백나무 씨앗)의 경우 원래 모발에 쓰는 약재가 아니었다. 김 연구원은 “신경을 안정시키는 약재라 탈모에도 효과가 있지 않을까 했는데 세포 실험 결과로 입증됐다”고 말했다. 지난해 ‘려’의 일본 수출을 앞두고 또 창의력을 발휘했다. 일본 미등록 성분인 백자인을 쓸 수 없게 되자 ‘황금’이라는 한약재를 쌀식초로 가마솥에 덖어봤다. 모근 강화 효과에 항산화 효과까지 생겨 백자인을 대체할 수 있었다. 개량한 제품은 지난 연말 일본 홈쇼핑에서 3800세트가 35분 만에 완판되는 기록을 세웠다. 김 연구원은 “고서에 나오는 여러 약재와 제조방법을 자유롭게 시험한다”고 말했다. 배 연구원은 “모든 게 개방돼 있는 공간에 있다 보니 자유로운 생각과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것 같다”고 했다. 두 사람은 파격적으로 연꽃·수국 등 꽃을 원료로 자신들처럼 20대를 위한 ‘려 자생화초’를 올 4월 내놓기도 했다.

 구내식당·체육시설 등이 있는 미지움 지하 1층부터 2개 층은 햇빛이 들어오는 실내 정원이 있고 미술 작품이 배치돼 한적한 갤러리 같다. 설계 스케치를 문양으로 활용한 카펫이며 가구도 이 건물을 지은 시자가 직접 디자인했다. 이곳도 제한적으로만 공개되지만 이미 1300만 명이 감상했다. 영화 ‘도둑들’에서 예니콜(전지현 분)이 잠입한 박물관, 박물관장(신하균 분)의 사무실이 바로 이곳이다.

용인=구희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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