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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에 바란다.|한자 폐지 현실과 이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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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글날은 매우 특수한 날이다. 이런 날을 가진 것은 우리나라 밖에는 있는 것 같지 않다.그만큼 우리민족은 우리문자를 소중한 자랑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자랑이 자랑에 그치는 느낌이 없지 않다. 한글날에는 으레 한글은 세계제일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러나 이런 맹목적 예찬론을 듣기 위해서 한글날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날을 제정한 목적이 한해에 한번씩 한글자랑으로 소일하자는 것은 아니었으리라고 믿는다.
현명한 민족은 과거에 사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산다. 선조로부터 훌륭한 문화유산을 물려받은 것이 자랑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보다도 그 유산은 더욱 발전시키고 한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창조를 하는 것이 조상에게 부끄럽지 않은 도리가 아닌가 한다.
현대에 와서 사회가 극도로 복잡해지고 문화가 고도로 발달함에 따라 언어와 문자의 기능도 엄청나게 증대하였다. 특히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해방과 더불어 국어와 국자의 맡은 일이 갑자기 커졌기 때문에 그것을 감당해내기에 여러 모로 힘에 겨운 점이 드러났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문화·정치·사회의 모든 활동에서 우리의 언어와 문자가 적지 않은 결함을 드러냈던 것이다. 여기에 언어·문자문제가 있게되고 그것을 처리하기 위한 정책이 필요하게된다.
해방뒤 어느 부면이고 혼란 아닌 것이 없었지만, 언어·문자정책에 있어서처럼 혼돈이 거듭된 예도 드물 것이다. 그 근본적 원인은 언어·문자에 대한 시책을 관영요금이나 도시계획에 대한 시책정도로, 또는 이들보다도 더욱 가볍게 생각해온데 있는 성싶다.
정치·경제의 문제는5개년 또는 10개년을 단위로 하는 계획이 훌륭한 성과를 거둘수 있지마는, 언어·문자는 한나라의 문화 중에서도 그 가장 심층부를 이루는 것이기에 여기서는 적어도 세기를 단위로 하는 끈기 있고 지혜로운 계획이 있어야함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정치·경제에 관한 일이라면 으레 그 방면의 전문가들에게 물어야할 것으로 생각하면서 유구한 민족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언어·문자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한글날은 문자의 날이니 만큼 화제를 문자문제에 국한하기로 하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한자문제를 생각하게 되고 이를 에워싼 적지 않은 파란곡절을 생각하게 된다. 특히 얼마전 보도된 한자의 단계적 전폐에 대한 자못 강력한 정부의 방침이 우리의 머리를 스친다.
실상 지금 우리나라 학계에는 한자폐지를 둘러싸고 크게 양론으로 갈려있다. 그러나 그 어느 쪽도 충분한 연구의 밑받침이 없다. 한자를 빨리 없애자고 주장하는 이들은 그럼으로써 우리의 문자생활이 겪게될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해본 일이 없으며, 한자사용을 주장하는 이들도 그들의 이론적 근거가 된 정확한「데이터」를 제시한 일이 없다. 그저 막연한 관념적 논쟁만 되풀이하면서 섣부른 시책이 취해져 옴으로써 실은 우리나라의 문자생활, 특히 젊은 세대의 그것에 우려할 만한 사태가 이미 벌어지고 있음을 우리 는 두려움 없이는 바라볼 수 없다.
한자는 종당에는 없어져야될 운명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훈민정음의 창제는 이제 문자와 한자의 대결을 숙명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이 대결은 마침내는 이 새문자의 승리로 끝날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그렇게 되기를 진정으로 바라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이지 현실이 아니다.
우리가 오늘날까지 한자를 버리지 못하고 쓰고있는 것은 일부 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사대주의에 중독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번연히 어려운 문자인데도 한자를 쓰는 것은 그것을 써야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을 쓰지 않게 하려면 이런 필요성들이 없어지게끔 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글로 그것들을 보완할 수 있도록 해야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랜 세기에 걸친 민족적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한자 없이 한글로만 쓰면 얼마나 깨끗한가. 이 깨끗함을 위해서는 무엇이나 희생해도 좋다고 하는 순수론자들이 있다. 그러나 문자는 앞서도 말한 것처럼 현재생활에서 엄청나게 큰 기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의무는 이 기능을 다하는 것이다. 깨끗하기만 하고 이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문자생활을 나아가서는 학술·문화·사회 전반을 마비시키고 말 것이다. 순수를 위해서 생명자체를 희생할 수는 없다.
오늘날 우리가 언어·문자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불행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불행도 우리의 것이므로 이것을 극복해야 할 사람은 우리밖에 없다.
이제부터라도 늦지 않으니 우리는 언어·문자정책을 정도에 올려놓도록 노력해야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의 언어·문자의 제반문제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먼저 이루어져야할 것이다.
이러한 과학적 기반 위에서만 문제의 올바른 파악과 그 해결책이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전민족의 지혜가 잘 조직된 기구 속에서 유감 없이 발휘되도록 돼야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언어·문자문제를 광범하게 연구하고 그에 관한 정책수립을 도맡을 최고기구로서「국어연구소」의 설립이 시급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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