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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짓밟힌 자유 불굴의 항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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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소련군와「체코슬로바키아」침공으로 받은 충격은 이제 『「체코슬로바키아」의 운명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가?』라는 초조한 질문으로 바뀌어 간다.
그러나 이 질문에 설득력있는 답변을 할수 있는 사람은 없다. 동구전체를 무대로하여 세계를 진감시킨 정치극의 주역이 비밀의 장막에 싸인 「크렘린」사람들의 손으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때마침 한국사정을 취재하러 서울에 온「체코슬로바키아」계의 미국인기자 「하워드·소슈레크」씨를 반도「호텔」의 숙소로 찾아가 소박한 일문을 던져본다.

<소 지도체제 따라 사태변화>
-그러니까 「두브체크」의 자유화정책은 아주 실패로 끝장이 난 셈인가요?
『그건 너무 성급한 결론인걸. 사태가 완전히 해결된게 아녜요. 「프라하」의 신지령체제의 정비가 안되었다는 점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크렘린」자체의 입장이 아직 확정되지 않은것 같아요. 「크렘린」내부의 강경파와 온건파 간의 의견대립, 다시말자면 「체코슬로바키아」대책을 둘러싼 논쟁이 여진히 계속되고 있어 어느편이 이기느냐에 사태의 결말이 달려있어요.』
-무력침공자체가 강경파의 우세 또는 숭리의 결과일텐데….
『급한 김에 우선 발등의 불부터 끄고 본거지. 우선 행동이 있고, 다음에 이론적인 정리를 한다는 순서같아요. 「프라하」의 자유화의 격낭은 당장에라도 동구의 사회주의체제의 바탕을 침식할것 같은 위기의식 때문이죠. 특히 동독과 「폴란드」에 대한 위협은 심각하다고 「크렘린」지도층은 판단한것 같아요.』
양친이 「체코슬로바키아」사람으로 자신은 미국서 출생하여 20여년동안의 기자생활을 하는 동안 소련과 동구를 주로 현지취재해온 「소슈레크」씨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내일』에대해 어느편이냐하면 비관적이었다.
『「크렘린」논쟁서 다분히 강경파가 우세합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경제적으로 소련의 이해에, 그리고 군사적으로 그의 안전보장에 직결되어 있기때문에 앞으로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해 무자비한 탄압과 내정간섭을 할것으로 예상돼요. 「체코슬로바키아」에는 당분간 「빠져나갈길」이 없는것 같아요. 슬프고 비극적인 시기라고나 할까….』
이 대목에서 「소슈레크」씨는 일단 말을 끊고는 옆에 앉은 소련태생의 부인 「타티아나」여사에게 동의를 구하는 시선을 던졌다. 「소슈레크」씨는 59년 「모스크바」서 「타티아나」여사를 만나 결혼했다. 소련정치사를 연구하는 부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소수레크」씨는 소련과 「체코슬로바키아」관계가 파국에 이른과정을 길게 설명했다.

<경제위기로 개혁의 길 트여>
『50년대말기, 60년대초기만해도 두나라의 관계는 「따듯하고은근」했어요. 소련이 경제적으로 「체코슬로바키아」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으니까.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의 화학공업제품과 그 기술을 절실히 필요로 했는데, 예를하나들면 소련서는 「필름」이 전혀 생산되지 않고 동독이나 「체코슬로바키아」제를 수입해서 썼어요.
물론 명분상으로는 「코메콘」체제내에서의 상호협력이지만 실제로는 소련에의한 일방적인 착취였지. 그 결과 「체코슬로바키아」는 60년대에들어서서 공전의 경제적인 위기를 맞아 변화가 요구된거죠. 긴눈으로 보자면 이변화의 요구, 다시말하면 개혁의 필요성은 「두브체크」같은 개혁파의 등장의길을 마련한 셈이예요. 「노보트니」체제라는건 완전히 친소, 보수에 발이묶여 있었으니까.』
-이번사태에서 소련의 득실은?
『앞서도 말했지만 소련의 군사적인 개입으로도 사태가 완전히 해결되지 못했어요. 「두브체크」를 굴복시킨것은 일시적인 성공일뿐이예요. 소련은 애당초 「프라하」에 친소정권을 세울계획이었지만 국민들이 「두브체크」노선을 전적으로 지지함으로써 실패했어요. 괴뢰정귄수립이 가능하다고 본것이 소련측의 치명적인 오산이었어요. 전술적인 「득」이 전략적인 「실」을 못따를거예요.』
-「두브제크」측의 실책같은건?
『소련서 자라고, 소련서 교육을 받아 소련을 잘아는 그사람이 「크렘린」지도층에 「스탈린」주의의 요소가 때를 기다리며 복병하고있다는 사실을 간파하지못한 순진성을 탓할수있지.』
-그렇다면「두브체크」를 처형하지 않은것은 어떻게 설명할수 있죠?
『간단하지. 「체코슬로바키아」국민전체의 지지를 받고있기 때문이예요.』

<소 침공으로 동서관계 냉각>
-국제정치, 더욱 범위를 좁혀서 동서관계는 어떤영향을 받게 될까요?
『소련은 도대체 세계여론따위를 개의치 않아요. 뿐만아니라 소련은 「흐루시초프」이래 평화공존을 제창해왔는데 이번 무력침공으로 국제적인 불신이라는 대가를 지불했어요. 이 불신때문에 미소관계를 비롯한, 모든 동서관계가 당분간 냉각될 것이라는 점에서 소련이 치른 불신이라는 대가는 자유진영에도 부담을 준다는 점이 특징이랄까.』
-미국으로서는 전혀 손을 쓸방도가 없었나요?
『병력을 동원하여 소련과 맞붙어 싸울수야 없지 않아요? 2차대전이 끝날때 미소세력권을 형성한게 애당초 잘못이예요.』
-「체코슬로바키아」사람들이 이번에 자유를 쟁취하는 기회를 놓친다면 그들은 앞으로 얼마를 더 기다려야 할까요?
『그건 그들이 얼마만큼의 희생을 치룰 각오가 되어있느냐에 달려있어요.』
이말을 받아 「타티아나」여사가 한마디 거들었다.
『소련의 젊은이들의 자유화의 요구가 「크렘린」지도자들을 움직일 만큼 커질때는 사정은 완전히 달라지죠.』 <김영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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