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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버림받은 대한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남대문에서 중앙청으로 통하는 대로는 수도서울의 정로(정로)로 국가적 이용을 갖추기 위해 일직선으로 되었다. 그런데 종래의 넓은 폭을 더욱 넓히기 위해 덕수궁 쪽으로 10미터를 잠식한다는 것이 어느새 정해진 도시계획이었다. 덕수궁은 이조중엽 선조, 광해군, 인조를 거치고 정릉 동행궁, 경운궁, 명례궁 등으로 명칭을 바꾸어 가면서 역사무대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이같은 고궁(고궁)의 전사(전사)는 그만두더라도 한말 고종33년(건양원1896) 아관파천(아관파천)이 있은 그 이듬해부터 고종은 내리 여기를 궁으로 사용하였고 따라서 한말의 복잡한 열강의 침투와 각축장의 진원이 된 역사가 주마등 같이 우리국민의 뇌리에 떠오른다.
「헤이그」밀사사건 때문에 일제는 고종을 강박, 순종에게 양위케 하고 상왕(상왕)으로 앉혔다. 이때 상왕의 장수를 빌기 위하여 궁의 명칭을 덕수궁으로 고쳤다.
현재의 궁궐은 석어전·준명당의 초기건축을 제외하고는 1904년의 큰불로 인하여 중수한 60여년래의 결구(결구)이다.
덕수궁은 이와 같이 한국의 비운을 걸머진 궁궐이었으며 1919년 고종의 국장(국장)때는 전국에서 운집한 국민이 대한문 앞 광장에서 통곡하였는데 이 통곡은 국권을 상실한 온 겨레의 통곡으로서 드디어 3·1운동의 횃불이 되었다.
덕수궁을 사적(사적) 124로 지정한 소이는 이러한 데 있다고 할 것이다. 사적은 될수있는 대로 원위치와 원상이 존중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국가의 정책도로라는데 문화재위원회는 양보를 하였던 것이나 담장의 복구와 대한문만이라도 원위치에 남겨서 3·1운동의 기념탑으로 삼고자 한 것이었다. 원래 문화재위의 지시는 대한문을 중심으로 원형의「로터리」를 당당하게 만들도록 하였는데 지금 되어 가는 공사를 본즉 대한문을 타원형으로 겨우 둘러싸서 마지못해 노변에 남기는 격이 되었으니 무엇이나 제멋대로다.
새로이 쌓아 가는 궁장(궁장)은 그래도 푸근한 감을 주는데 그 뒤에 아직 남겨진 「바라크」전시장이 함령전을 비롯한 궁궐의 추녀선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또 눈에 거슬려 그 철거가 시급히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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