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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0 장병 넋 바쳐 얻은 이 길 위에 자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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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29일 다부동 전적기념관을 찾은 다부동구국용사회 참전용사와 시민들이 구국용사충혼비 앞에서 묵념하고 있다. 오른쪽 구국용사의 묘(무명용사 묘)는 국군 제50사단 장병들이 유학산 일대에서 발굴한 259점의 유해를 합장한 것이다. [프리랜서 공정식]

27일 오전 11시 경북 칠곡군 가산면 학산리 팥재주차장. 가파른 700m 길을 오르자 유학산(遊鶴山)의 깎아지른 암벽 아래로 절이 나타났다. 비구니 사찰인 도봉사다.

 유학산 6·25 격전지 제1코스 순례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유학산 정상인 ‘839고지’까지는 다시 800m. 경사는 급해지고 길 곳곳에 돌부리가 튀어나온 험준한 산이다. 주변 산은 온통 검푸른 색이다. 유학산 일대는 평화로운 산 이름과 달리 전쟁 때는 화약 냄새와 피비린내가 진동한 곳이다. 유학산은 대구를 지키는 최후의 방어선이었다. 1950년 8월 13일 북한 인민군 제15사단이 유학산을 선점하면서 국군 제1사단은 뺏고 빼앗기는 탈환전을 아홉 차례나 벌였다. 당시 참전했던 여중구(83·대구시 남구 봉덕동) 다부동전투구국용사회 대구지부장은 “하루에도 전사자 수십 명을 목격했다”며 “분대끼리 밥을 먹다가도 폭탄이 터지면 반은 죽고 반만 살아남는 생사의 갈림길이었다”고 회고했다.

 왜관철교에서 유학산 일대에 걸친 다부동 전투는 55일간 이어지면서 전사자가 속출했다. 다부동 전적기념관 신현종 과장은 “전사자만 국군 2300명, 미군 1282명, 경찰 197명에 인민군은 사상자가 1만7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설명했다. 6·25 최대의 격전지다. 그래서 도봉사는 하루도 빠짐없이 유학산 원혼을 달래는 기도를 한다.

다부동 전적기념관에 세워진 전적비.

 국군은 유엔군과 연합작전으로 다부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내 기사회생했다. 맥아더 장군은 그사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고 전세는 북진으로 역전됐다. 다부동전투구국용사회는 94년 50사단 등의 협조로 유학산 일대에서 유해 발굴에 나섰다. 수많은 유골과 유품이 수습됐다.

 칠곡군은 99년부터 유학산에 6·25 격전지 순례 탐사로를 만들었다. 1코스를 20분쯤 올라가자 이름 모를 붉은 꽃이 당시의 아픔을 전하듯 길가에 피어 있었다. 30분 만에 839고지에 세워진 ‘유학정’에 올랐다. 동행한 칠곡군 남성태 문화예술담당은 “동남쪽 방향이 대구”라며 “지금은 유학산이 해맞이를 하는 희망과 평화의 장소가 됐다”고 말했다.

 능선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가면 837고지, 793고지 등이 나오고 ‘다부동 전적기념관’으로 이어진다. 격전지 순례 2, 3코스다.

 전적기념관을 들어서면 작은 무덤 하나가 있다. 97년 유해 발굴이 1차 마무리되면서 이름 없는 용사들의 유골 259점을 합장한 ‘구국용사 묘’다.

 그 앞으로 다부동 전투에 참가한 국군 제1사단과 미군 장병 등 2100여 명의 이름이 돌에 새겨져 있다. 이름은 군데군데 고쳐져 있다. 자료나 생존자의 증언을 통해 뒤늦게 바로잡은 경우다. 당시 노획한 인민군의 무기도 전시돼 있다. 인민군 전차를 떨게 했다는 미군의 로켓포도 있다. 다부동 전투 등을 생생하게 담은 10분짜리 영상도 볼 수 있다. 다부동 전적기념관은 6월이면 참전용사와 학생·시민 등 주말에 하루 1000여 명을 맞이한다. 살아 있는 안보교육장이다.

 칠곡군 송옥생 문화관광해설사는 “다부동 전적기념관은 호국이란 표현 대신 유일하게 구국이란 단어를 쓰는 곳”이라며 “칠곡군은 호국을 넘어 구국의 고장”이라고 강조했다.

송의호 기자

유학산 6·25 격전지 순례길

제1코스 팥재주차장~도봉사~839고지 (유학정)

제2코스 다부동 전적기념관 ~ 674 고지~793고지~837고지~유학정~도봉사~비리골

제3코스 다부동 전적기념관 ~ 674 고지~793고지~837고지~유학정~도봉사~팥재주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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