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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나고 센 놈, 하지만 사람 냄새 나는 조폭이죠”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조직의 2인자 역할을 맡은 배우 정경호. 부드러운 이미지를 벗고 강한 남자로 변신했다. 전호성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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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간도’ ‘범죄와의 전쟁’ ‘신세계’…. 스크린을 장악하던 남자들의 거친 세계가 브라운관으로 넘어온다. JTBC가 27일부터 매주 월·화요일 내보내는 새 드라마 ‘무정도시’(밤 9시50분) 얘기다. 거대한 마약 조직 속에서의 세력 간 암투, 이들을 체포하려는 경찰과의 대결 구도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국내 첫 정통 TV 누아르(noir) 드라마라는 시도도 새롭지만, 주인공에 대한 관심 역시 그 어느 때보다 높다. 배우 정경호(30)는 지난해 9월 군 제대 뒤 첫 드라마로 ‘무정도시’를 택했다. 극 중 마약 조직의 중간 보스인 정시현 역을 맡아 평소 부드럽고 편안한 이미지를 벗고 ‘상남자’로 변신했다. 한창 촬영 중 짬을 낸 그를 23일 오후에 만나 자세한 얘기를 들었다.

 -제대 뒤 첫 드라마다.
  “‘무정도시’ 전에 3~4개 지상파 드라마 섭외가 들어왔다. 지금 방영 중이거나 막 끝난 작품들이다. 그런데 딱히 특별한 게 없었다. 그 와중에 ‘무정도시’ 대본을 보고 끌렸다. 무엇보다 공동 연출자인 이정효 감독을 믿었다. 군대 있을 때 이 감독님의 드라마 ‘로맨스가 필요해(tvN)’를 즐겨 봤다. 여자의 감정선을 세심하게 그려서 감독이 여자인 줄 알았다. 언젠가 꼭 한 번 작품을 같이하고 싶었는데 마침 ‘무정도시’를 한다고 해서 무조건 오케이했다.”

 -영화 ‘신세계’나 ‘범죄와의 전쟁’과 다른 점을 꼽자면.
 “드라마는 영화와 다르다.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지만 영화처럼 자극적이고 센 장면들이 순화될 수밖에 없다. 대신 사람에게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조폭의 세계를 폭력만이 아닌 사람 냄새 나는, 인간적인 부분으로 그려낼 수 있다.”

 그가 맡은 정시현은 어두운 캐릭터다. 청량리 성매매촌에서 일하던 엄마를 일찍 여의고 마약 조직에 들어간다. 그러다 잠입수사를 위해 조직에 들어온 경찰 윤수민(남규리 분)과 사랑에 빠진다.

 그는 처음 역할을 맡고 고민이 컸다고 했다. 시현과 공감이 필요해 대본에 서른다섯이었던 나이도 동갑으로 바꿨다. “얘는 뭐가 뒤틀렸기에 이런 일을 할까, 아무리 환경이 불우했어도 이럴 수 있을까, 그런 게 궁금하면서도 안타까웠다. 진짜 나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 촬영 중인 지금도 시현이란 인물을 풀어가고 있다.”

 -‘상남자’ 연기를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상황 자체가 가볍지 않은 인물이다. 중간보스라는 역할은 불안을 안고 사는 거다. 강하고 거친 게 전부가 아니다. 처음 대본에는 시현이 꼭 수퍼맨 같았다. 맘만 먹으면 일인자도 되고 사랑도 쟁취하고 과거도 쉽게 털어버리고. 하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다. 감독님과 얘기하면서 잘나고 센 놈이지만 주변 인물한테 많이 기대는 인물로 그리는 게 좋겠다고 했다. 상남자라는 건 표면적인 이미지다.”

 -복합적인 감정선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오히려 현장에서 장난을 많이 친다. 감정선은 촬영 들어가기 2~3개월 전에 80~90%를 정해 놓는다. 현장에서 10% 정도 여유분으로 남겨놓는달까. 촬영 전부터 장면 하나하나를 다 짜놓는 편이다. 미리 감독님과 얘기를 굉장히 많이 한다.”

 -‘점찍어둔’ 감독과 함께 해보니 어떤가.
 “실망했다. 맨날 밤새운다(웃음). 섬세한 분이다 보니 장면이 많아서다. 사실 둘이 너무 생각이 비슷해서 문제다. 뭐에 꽂히면 한 장면 가지고도 계속 얘기하는 스타일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면.
 “원래 작품을 고를 때 이게 말이 되나, 실제 일어날 수 있을 법한가를 자문한다. 시현은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보지 못하는 인물이라 공감을 일으키는 한 컷이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시현이 우연히 길을 가다 등교하는 대학생, 아기 보는 젊은 아빠를 바라보는 장면이 오래 남았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생각하는 연기였는데 꽤 그럴 법하게 느껴졌다. 그 또래는 누구나 자기 인생에 불안해하지 않나.”

 그는 이미 10년차 배우다. 2004년 KBS 탤런트 공채로 뽑힌 뒤 같은 해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로 얼굴을 알렸다. 그때 맡았던 철부지 가수 윤의 이미지는 지금도 강하다. 드라마 ‘개와 늑대의 시간(2007)’, 영화 ‘거북이 달린다(2009)’ 등에서 제법 묵직하고 거친 이미지를 선보였지만 대중의 기억 속엔 여전히 부드럽고 여성스러운 남자로 남아 있다.

 -10년차 배우로서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은 없나.
 “10년이란 세월에 나를 다 보여줄 순 없다. 하지만 요즘 아이돌 배우들도 많이 나오는 걸 보고 생각이 많아졌다. 군대 가면서 2년이란 공백이 있었고 내가 이 작품을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됐다. ‘무정도시’를 택할 수 있었던 건 그래서 참 다행이다. 지금까지 솔직히 사람들이 정경호를 잘 알지도 못하고 스스로 이미지도 확실히 보여주지 못했다. 지금부터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부터 30대에 가장 잘할 수 있는 연기를 해야 40, 50, 60까지 선택받는 배우가 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이번 작품이 꼭 잘 돼야겠다.
 “왜 그래야 하나. 원 없이 연기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스스로 군대 다녀와 연기를 다시 시작한다고 생각했고, 공부하는 마음으로 찍었다.”

 -아버지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엄마가 뿔났다’ ‘무자식 상팔자’ 등을 연출한 정을영 PD다. 어떤 도움이 되나.
 “지금 유럽 여행 중이신데 그냥 존재 자체가 큰 힘이다. 드라마 감독 중 나이가 아마 가장 많을 텐데 여전히 젊은 감각과 영상을 보여주신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만 봐도 그렇지 않나. 아버지가 늘 공부하면서 작품을 만들기 때문에 나도 조금 더 바른 연기자가 되려고 한다. 그분의 아들이라는 게 감사하다. 이 점 말고 나머지는 다 단점이다(웃음).”

 그는 좋은 배우가 돼 오래오래 연기하는 게 꿈이라고 했다. ‘좋은 배우’가 ‘공부하는 연기자’나 ‘성실한 연기자’를 말하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그건 배우라면 당연한 일”이라고 일축했다. 그러고는 “하정우 선배가 얘기해 준 조언이 4000개쯤 되는데 그거 다 말하면 밤새운다”며 그저 웃었다. 하지만 그가 스스로 깨달은 ‘좋은 배우론’은 따로 있었다. “아직까지 해보지 않은 역할에 도전할 줄 알고, 그것을 자신 있게 보여주는, 그런 배우다.”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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