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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골 누각」에 벼락|"피의 금요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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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5월9일 금요일 밤은 「파리」 최악의 밤이었다. 「데모」대와 경찰 부상자를 실어 나르는 「앰뷸런스」의 「사이렌」이 「당페르·로슈로」가에서 「셍미셀」에 이르는 학생가에 요란하게 울렸다. 이날 밤 「데모」대의 돌과 경찰의 곤봉과 최루탄으로 쓰러진 사람만 4백명, 「소르본」 광장은 피가 낭자했다. 60대의 자동차가 불타고 2백대가 파괴되었다. 거리는 돌과 최루탄으로 난장판이 되었고 「바리케이드」가 수없이 쳐 있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던 날과 1958년 「알제리」 위기 때 벌어졌던 사태와 방불했다고 한다.
학생 「데모」대는 돌로 포장된 차도를 모조리 뜯어 길 한복판에 석산을 만들고 그 위에 올라서서 경찰과 대치하고 돌로 경찰을 때리는가 하면 「개스·마스크」를 쓰고 「카빈」으로 무장한 경찰은 무차별 곤봉세례를 퍼부어 육박전이 벌어졌고 「데모」대는 상자에 휘발유를 담고 다니며 길에 세워둔 차에 붓고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폭력과 무력의 대결 「파리」는 폐시처럼>
이튿날도 길을 걷는 사람이나 지하철을 타는 사람은 모두 아직도 퍼져있는 최루탄 「개스」로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5월 초의 「파리」의 밤은 실로 아비규환의 수라장이었다.
「룩상부르」 공원이 굳게 닫히고 「소르본」은 폐문되었다. 학생가 일대의 상가는 철시한 듯 조용하고 도로포장을 헐어버려 시내교통이 마비되었다.
국회가 들고 일어서고 「드골」 대통령이 시시각각 사태의 진전을 보고받고 「파리」대학 「로슈」 총장 및 「마르티」 「파리」 교구주교는 「데모」대에 침착성을 호소하는 담화를 「라디오」를 통해 발표하는가 하면 대학교수들의 열띤 대담이 전파와 TV의 화면에 비쳤다. 며칠 전부터 폭력과 무력으로 대립해 온 쌍방의 타협은 쉽지 않았다.
「데모」대의 분노는 「퐁피두」 수상의 「라디오·텔리비젼」 방송으로 약간 가라앉았으나 13일엔 학생들을 옹호 지지하는 동정「데모」와 파업이 일반노총(공산당계)·전국교련(좌경)·노조세력(사회당계) 등의 합세로 일어나 전기가 끊기고 수도물이 안나오고 교통통신기관이 마비되고 우체국과 은행문도 닫혀 「파리」시는 또다시 긴장이 감돌았다.
이번 학생「데모」가 일어나긴 지난 3월 하순부터 「파리」대학교의 분교인 「파리」 남서쪽 교외에 새로 지은 「낭테르」대학에서 일어난 현교육제도의 불만이 도화선이 된 것이다.

<「페이르피트」 규정 「푸셰」안 타도 외쳐>
현재 「프랑스」에는 53만명의 대학생이 있는데 2만 이상이 「파리」에 몰려 있으며 「소르본」(문리과대)만도 3만5천, 「낭테르」 분교에 1만2천, 따라서 「파리」대학의 문리과 대학생만도 약 5만명에 달한다.
지난 3월 초 「낭테르」에서의 「데모」 구호는 「페이르피트」(현 문교장관) 규정 불가, 「푸셰」(전 문교장관)안 타도, 경찰압력 반대 등등이었다. 「페이르피트」 규정이란 학생기숙사 내의 남녀 왕래문제를 규정한 것인데 「프랑스」는 대학기숙사의 경우 대개 남녀관이 따로 있고 지금까지 상호왕래가 자유롭지 못해 학생들의 불만이 많았다.
사실 기숙사 문제는 이번 「데모」가 일어나기 오래 전부터 말썽이 되어 왔다.
1955년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학생기숙사가 있는 「파리」 남쪽 교외 「앙토니」관에서 1년에 4, 5명의 미아가 생겨 그때까지 트여있던 남녀관을 벽돌로 막으려다 학교당국자와 학생간에 크게 충돌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후 문교성의 양보로 21세 이상의 남녀는 상호 왕래가 자유롭게 허가되었다. 그러나 이 규정이 전국 학생관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특혜를 못받는 다른 곳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래서 나온 것이 「페이르피트」 규정인데 이 규정에 의하면 21세 이상의 남자학생은 여자를 자기 방에 초대할 수 있되 밤 11시까지는 여자가 나가야 하며 여학생은 남자를 자기 방에 초대할 수 없게 되어있다. 전국학생연맹은 이 규정을 남녀불평등이라고 규정, 반대성명을 발표했다.

<학비 연2천5백원 학생수 늘어나기만>
다른 불만은 1966년부터 실시되고 있는 「푸셰」안인데 4개의 수료증 획득으로 대학졸업이 가능하던 것을 변경, 누구나가 4년동안 취학을 해야 졸업을 하게 된 것이다. 이 제도는 또한 출석에 상관없이 시험만 통과되면 졸업할 수 있던 것을 고쳐 출석을 엄격히 따지게 했다.
이 새로운 학제의 실시는 학생들의 「아르바이트」를 거의 불가능하게 했다.
학생들은 무질서한 문교정책을 비난하고 세대교체를 주장했다.
「프랑스」 학제는 고등학교 졸업장만 있으면 누구나가 전국의 어느 대학이고 마음대로 입학할 수 있게 되어있다. 여기에다 1년동안의 수업료는 약 2천5백원 정도밖에 안되며 학생에 대한 여러 가지 특혜가 많아 「프랑스」는 학생천국이라고 불리고 있다. 이러한 학제 하에서 대학생의 수는 급증하게 마련이고 작년의 대학생 수는 2차대전 후 보다 4배로 늘어나고 있으며 대학졸업자들은 취직이 제대로 안되어 야단이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대학입시 제도 실시를 주장하고 있으나 이도 또한 학생들의 반발을 받고 있다. 또하나의 큰 골칫거리는 「프랑스」의 대학생들이 너무 중앙에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약 53만 대학생 중 반 이상이 「파리」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프랑스」정부는 1965년부터 교육 지방분산화를 장려하고 있으나 수백년의 오랜 전통이 하루이틀에 바뀔 수는 없는 것이다.

<좌계주동 밝혀지자 정부태도도 굳어져>
이상과 같은 정부의 약점을 이용한 것이 좌익계 학생들의 선동이다. 공산당이 합법화 되어있고 「드골」 대통령의 외교정책이 동구유화를 위해 공산국가들과 적극 외교를 벌이고 있으며 「프랑스」 학생노조 중 가장 강력한 것이 좌익계 학생단체인 「프랑스」 전국학생연맹이다.
「데모」의 처음 요구조건이야 어떻든 「낭테르」대학의 「데모」 선동자가 친공주의자란 것을 알게 된 문교당국은 학원 내의 집희를 불허하게 됐고 이에 응하지 않자 휴교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이와 동시에 친정부지인 「르·피가로」는 학생「데모」를 폭동으로 단정해 버렸다. 분노한 학생들은 「르·피가로」사에 투석을 했고 「드골」 살인자란 구호를 외치게까지 했다.

<동구데모와 대조적 젊은 세대에 문젯점>
한편 「프랑스」정부는 이번 「데모」가 전국적으로 번진 가장 큰 이유가 경찰의 학원 내 침입으로 간주하고 13일 공소원의 판결로 투옥된 학생들을 석방시켰다.
그러나 학생들은 내무장관 및 「파리」시장의 사임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번 「데모」로 교수·학생 공동위원회가 조직되어 앞으로의 문교정책, 학원 내의 여러 가지 문제를 토의토록 했지만 친공학생들의 정치간섭이 뿌리뽑히지 아니하는 한 앞으로 혼란이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아무도 단정하지 못하고 있다.
동구의 학생들이 자유화를 위해 죽음을 무릎쓰고 「데모」를 벌이고 있는 반면 자유 서방제국에서는 자유에 싫증이 난 젊은이들이 공산주의 사회체제에 막연한 「노스탈지」를 느끼고 있는 사실은 구라파의 젊은 세대가 병들고 있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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