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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만의 무대 … 그녀는 암을 이겼고 그는 시력을 잃어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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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21일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 스몰린 성당에서 피아니스트 이경미씨가 상트 페테르부르크 심포니와 협연하고 있다. [사진 지토패밀리]

19일(현지시간) 오후 2시. 러시아 제2의 도시 상트 페테르부르크 음악원 근처 아파트. 피아니스트 이경미(51)씨와 상트 페테르부르크 심포니 상임지휘자 알렉산더 드미트리예프(78)가 피아노를 사이에 두고 앉았다. 이씨가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9번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한 시간 반 이어진 연습은 3악장에서 멈췄다. 드미트리예프는 “이건 로맨스가 있어야 해요. 남녀가 함께 춤을 추는 그런 감정이 있어야 해요”라고 했다. 그러더니 가볍게 몸을 흔들며 왈츠를 췄다. 이씨의 연주에 맞춰 한참 춤을 춘 드미트리예프가 이마에 흘린 땀을 닦았다. 연습은 오후 5시 넘어 끝났다.

피아니스트 이경미(왼쪽)와 지휘자 드미트리예프.

 둘은 91년 처음 만났다. KBS 교향악단 음악감독을 지내기도 한 지휘자 드미트리 기타옌코(73)의 소개로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협연을 하게 됐다. 당시 러시아는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가 한창이었다. 공항에는 기관총을 든 군인들이 있었고, 빵집 앞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화폐개혁의 후폭풍이었다.

 이씨는 “‘과연 음악회가 열릴 수 있을까’라고 걱정했는데 (드미트리예프가) 관객들이 잘 차려 입고 올 거라고 안심시켜줬다”고 기억했다. 실제로 2000여 객석이 이씨의 모차르트 연주를 들으려는 사람들로 꽉 찼다고 한다.

 이씨는 94년 백야축제 때 다시 초청됐다. 2000년에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심포니와 함께 일본 10개 도시를 돌았다. 그러다 2009년 유방암이 발견됐다. “음악 말고는 해본 게 하나도 없는데. 너무 억울했어요. 앞으로 피아노는 쳐다보지도 않을 거라고 다짐했죠. 항암 치료 2년 동안 건반 한 번 만져본 적이 없어요.”

 그가 다시 피아노 앞에 앉게 된 건 드미트리예프의 전화 한 통 덕분이었다. “네가 피아니스트건 아니건 우리 부부는 너를 사랑한다”는 말에 왈칵 눈물을 흘렸다.

 21일 오후 7시. 이씨는 스몰린 성당에 마련된 특별 무대에 드미트리예프와 함께 섰다. 22년 전 그날처럼 관객들이 가득했다. 레퍼토리는 모차르트가 8살 때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 9번. 4년 전 약속한 공연이었지만 암치료로 늦어졌다. 이씨는 1·2악장에선 차분하고 신중하게 건반을 눌렀다. 3악장에선 한결 가벼워진 손으로 리듬을 탔다.

 드미트리예프는 피아노 소리에 맞춰 몸 전체를 흔들어가며 지휘했다. 이씨는 이번 무대가 그와 함께하는 마지막 연주가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드미트리예프는 망막 이상으로 시력을 잃어가고 있다.

 이씨가 말했다. “선생님은 아무리 짧은 음악이라도 한 사람의 인생이 담길 만한 스토리를 만들어요. 그게 드미트리예프의 음악이죠. 음악에 담긴 이야기를 나누는 게 행복이라는 걸 가르쳐 주셨어요. 그런 열정을 봤기에 음악을 다시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상트 페테르부르크=강기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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