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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공에 휴전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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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국중부의 거칠고 적의에찬 산맥을 사이에 두고 그들의 결심여하에 따라서는 한국전쟁을 다시 터지게 할 수도 있는 두 사람이 서로 상대방을 노려보고 있다.
한사람은 북괴의 성급하고 과대망상증에 걸린 독재자 김일성이며, 또한 사람은 끈기있고 과묵한 한국대통령 박정희씨이다. 두 사람은 다같이 양단된 그들의 나라를 다시 통일하겠다는 정열에 불타있다.
두사람의 통일방안에는 증요한 차잇점이있다. 즉 김일성은 공산정복을 모색하고있으며 박대통령은 자유로운 민주통일을 원하고있다.

<서울까지 공비침투>
월남에서 미군이 싸우고있는 한편으로 제2전선이 한국에서 형성되지 못하도록 신경을 쓰고있는 미국당국은 두적대 세력을 극한선에서 물러나게 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미국은 김일성을 달래고 박대통령을 만류함으로써 한국위기를 냉각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주한미 제2사단과 제7사단의 미군들은 비무장지대일대에서 임전태세를 갖추고있다.
박대통령과 김일성의 적의는 박대통령을 암살하려는 최근의 김의 시도로 증가했다.
북괴의 독재자 김은 박대통령관저인 청와대를 침입, 박대통령을 암살하기위해 훈련받은 31명의「테러」분자들을 남파했다. 이들 북괴무장도당은 지난1월21일 청와대에서 몇 백미터안의 거리까지 침입하였으나 한국군·경에 포착되어 마침내 소탕되었다.

<평화조약 아닌 휴전>
2월8일의 한공산당집회에 나오게된 김일성을 처치할 목적으로 박대통령이 평양에 암살대를 보내는 일을 못하도록 미국은 온갖 압력을 가했다.『우리에겐 계획이있다』고 한 한국고위관리는 서울에서 거친 어투로 나에게 말하면서 아직도 그러한 생각은 없어지지 않았음을 시사했다.
한편 한국휴전은 53년7월27일 조인된 이래 어느 때보다 가장 불안정한 것이 되어버렸다. 이 휴전은 포격전을 멈추었을뿐 최종적인 평화조약은 결코 조인되지 않았다. 오만하게 휴전협정을 무시하면서 김일성은 교란정책을 추구해 왔다. 북괴무장간첩들이 박대통령을 암살하러 남파되고 그로부터 이틀후 북괴정비정이 미국의 정보수집함「푸에블로」호를 나포한 사건이 일어났을때 김의 교란행위는 결정에 달했다.

<북괴휴전위반 잦아>
밤이면 밤마다 북괴침투분자들은 미군 초소에대한 공격을 강화했다. 잠정적이며 지연전술작전의 방편으로 밖에는 김일성이 휴전을 인정치 않고있다는것은 그의 위와 같은 발작적 행위로보다 분명하다.
『우리는 남한의 혁명을 완수, 조국을 통일해야 한다』고 평양방송을 통해 김은 발악하기를 거듭해 왔다.
박대통령으로서는 휴전은 조인하지 말았어야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박대통령은 휴전은 문제의 해결을 단지 연기한데 지나지 않으며 공산측이 전쟁재발태세를 강화하기 위해 휴전을 이용해 왔다고 비난하고 있다.
박대통령은 청와대에서의 단독회견을 통해 나에게『휴전이 협상되었을때 우리는 이에 반대했다. 우리는 공산측에 침략의 대문를 지불하도록 요구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뿐인가, 한국에서 모든 공산분자들을 제거할 것을 원했다.

<전쟁 끌었으면 성공>
그러나 미국내의 여론때문에 귀국(미국)은 휴전에 찬성했다. 이것은 실책이었다』고 말했다. 박대통령은『만일「유엔」군이 전쟁을 5∼6개윌만 더 지속했다면 중공은 한국에서 소위 의용군을 철수했을 것임을 보여주는(그의 주장)모종의 정보문서』를 인용하였다.
그는『중공은 아마도 전투를 계속 할 수 없었을 것이다.「유엔」이 휴전에 동의했을때 중공은 위기를 모면했다』고 말했다.
휴전전야 북평에서는 미국의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움직임을 우려하고 있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첫째, 미국은「오끼나와」에 원자무기장비를 갖추었으며 인도대사관을 통해 중공에 미국보급선에대한 어떤 공격도 핵보복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둘째,「드와이트·아이젠하워」미국대통령은 장개석자유중국 총통의 손을 풀어놓았다. 그러므로 50만 자유중국군대는 갑자기 중국본토에 위협적 존재가 되었다.
또한 미국은 중공에대해 다시금 인도대사관을 통해 만일 쌍방이 당장 휴전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연합국측은 전면 공세를 재개할것이라는것과 만주에대한 공격을 더이상 면제해줄 수 없음을 통고했다.

<약세의적 휴전동의>
53년7월 전선전역에서 얼맛동안 전투가 벌어졌으나 이는 중공과 북괴가 미국의 결의를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전투에 이어 갑자기 그들은 휴전협정에 동의했다. 박대통령의 견해에의하면 휴전을 수락한다는 공산측의 의사는 연합국측이 공세를 취했어야했다는 가장 적절한 증거임을 의미한다는 것이었다.

<미의 우유부단격노>
박대통령은『전쟁을 끝까지 밀고갔더라면 한국문제는 해결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일우리가 전쟁을 끝냈다면 현재의 긴장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국사람치고도 키가작은 박대동령은 생김새가 다부져보인다. 말소리는 조용하나 웃을때의 모습이 딱딱하다. 그러나 눈에서는 강렬한 결의를 엿볼수 있으며 입의 생김새는 근엄한 권위 같은 것을 풍긴다.
기왓장이 푸르대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청와대에 있는 그의 사무실은 독특한 남성 「클럽」과 같은 체취가 풍긴다. 「린든·B·존슨」미국대통령의「칼라」사진 한장이 박대통령의「데스크」왼쪽의「스탠드」에 놓여있다.
그러나「존슨」대통령의 사진이 거기놓여있다해도 그것은 박대통령에게 아무런 효과도 주지 못하였다. 박대통령은「존슨」대통령의 북괴를 다루는 우유부단한 처사에 대해 분노를 감추려하지 않았다.

<휴전은 미해결 남겨>
박대통령은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을 통한 수재 밑에서 사는 것이 어떤것인지를 설명했다. 그는『휴전은 한국과 북괴간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였을뿐 아니라 문제를 미해결 된채 팽개쳐버렸다. 휴전은 아무것도 해결치 못했다. 이와 같은 경험의 없는 일부 국가들은공산주의자들의 비인도적이고도 부도덕한 행동이 어느 것인지를 알지 못할것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이것을 경험했다. 우리는 공산주의가 어떤것인지를 알게되었다』고 되풀이 강조했다.
한국의 경제는 박대통령의 영도 밑에서 미국의 원조도 있고하여 향상되고 한국의 위신은 높아졌다. 한국의 이러한 반전은 독단적인 공리논자인 김일성의 좌절감을 더 깊게 해주었다. 한국의 발전과 비교해볼때 김일성의 공산 조직 체제의 성과는 한심했다.

<한국발전 북괴당황>
미국의 정보보고서에는 이런 말이 있다. 『초라한 북괴경제와 번창하는 한국경제를 비교할 때 나타나는 두드러진 대조는 김일성의 위신을 깎아내리는 것이었다. 61년 김은 야심적인 7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계획은 제대로 진척을 보지못했다. 7개년 계획이 초창기에 실패한 것이 분명 했다. 한편 한국경제는 60년에「붐」을 이루었고 65년까지 대부분의 산업부문에서 북괴의 성장율을 능가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때 한반도의 거의 모든 산업시설과 산업자원이 북괴에 남겨졌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김일성의 경제계획실패가 얼마나 극적이었느냐를 알게 될 것이다.』

<60만대군 대결태세>
외국의 많은 독재자처럼 김일성은 외국에대해 분쟁을 조성함으로써 국내의 실패로부터 관심을 외부로 돌리려고 해왔다. 만일 그 결과가 그렇게 심각하지만 않았어도 희극「오페라」의 포군과 같은 그의 행동은 가소로운 것이었을지 모른다.
김일성은 벌써 한국전쟁에 다시 불을 붙이려고 방아쇠에 손을 갖다 대고있다. 「러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60만군대의 지원을 받는 박대통령은 대결태세를 갖추고있다.
「존슨」대통령은 박대통령이 필요로하는 무기를 한국에 급히보내고있다.
그러나 만일 피할수만 있다면「존슨」대통령은「아시아」에서의 두개의 전선에 미국을 개입시킬 생각이 없다. 「존슨」대통령은 서울에있는 미국외교사절에게『미국은 자존심에 구애받지 앉을 만큼 강력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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