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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보건지소 있음 뭐하남유 … 의사가 없는데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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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의과대학을 졸업한 새내기 남성 의사들의 진로는 크게 두 가지다. 군의관으로 입대하거나 아니면 공중보건의로 근무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병역의무를 대체하는 것으로 인정받는 공중보건의는 농어촌 벽지의 의료 공백을 메우는 데 큰 몫을 해 왔다. 그런 역할을 해 온 공중보건의 인력이 3∼4년 전부터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이에 따라 산간벽지 등 의료 취약지대 주민들의 건강이 위협받고 있다.

경북의 한 보건지소 치과진료실 모습. 장비는 갖추고 있지만 진료를 해야 할 의사가 없다. 지난 4월 공중보건의가 전역한 뒤 후임자가 배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진 오른쪽 흰색 부분은 전역한 공중보건의의 빈자리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보건지소 요청에 따라 정확한 지명은 밝히지 않는다. [프리랜서 공정식]

#1. 충남 청양군 청남면 왕진리 버스정류소에서 이른 아침부터 첫 차를 기다리던 이모(66)씨는 퉁퉁 부은 볼을 감싸며 인상을 찌푸렸다. “어금니가 쑤셔 한숨도 못 자고 나왔시유. 공주로 나가 이빨을 뽑으려고유. 마을에 보건지소가 있음 뭐하남유. 의사가 없는데유.” 그는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한 시간 이상 거리인 공주의료원으로 갔다. 청남면에 사는 주민 2000여 명의 절반은 병원 신세를 자주 지는 60세 이상 노인이다. 의료기관은 공중보건의 한 명이 근무하는 보건지소가 유일하다. 치과 공중보건의는 2009년까지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대신 청양군 보건소의 공중보건의가 매주 금요일 순회진료를 온다. 이씨처럼 참을 수 없는 급성 통증 환자는 30㎞ 떨어진 공주까지 가야만 한다.

 #2. 경북 군위군 우보면 보건지소는 공중보건의 한 명이 19개 마을 주민 2167명의 진료를 전담한다. 의약분업 예외지역이라 주변에 약국도 없다. 이곳에서 2년째 근무 중인 공중보건의 김동수(29·일반의)씨는 한 시간 거리인 대구 집에서 통근하지 않고 관사생활을 한다. 오후 6시까지인 업무시간이 지난 뒤에도 찾아오는 노인 환자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김씨가 처음부터 혼자였던 건 아니다. 올해 초까지 함께 근무하던 공중보건의(치과)가 지난 4월 의무복무기간 3년이 지나 ‘제대’하면서 추가 인력을 배치받지 못했다. 그는 “평소엔 그럭저럭 버틸 만한데 1년에 2차례 1000명이 넘는 어르신에게 독감과 폐렴 예방접종을 해야 하는 날이 큰 문제”라며 “생각만 해도 벌써 하늘이 노랗게 변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여의사 늘고 군미필자 줄어 인력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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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어촌 의료의 마지막 보루라 할 수 있는 공중보건의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2009년 5287명이던 것이 해마다 줄어 지금은 3890명이다. 4년 새 4분의 1 이상 감소한 것이다. 이런 추세라면 2020년에는 3100명까지 줄 것이란 게 보건복지부의 예상이다. 그에 따른 의료공백 현상도 점점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농어촌이나 산간·도서지방의 상당수는 공중보건의가 없어지는 순간 무의촌(無醫村)이 되고 만다.

 공중보건의가 줄어드는 원인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새롭게 배출되는 의사·치의사·한의사 가운데 남성 비율이 예전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다. 의과대학의 경우 여학생 비율이 40%에 육박한다. 또 2003년 도입된 의학전문대학원 제도가 공중보건의 감소 추세를 가속화했다. 의학전문대학원에 입학하는 남학생 가운데는 학부 과정 중에 이미 군 복무를 마친 사람이 많다. 2010년 의학전문대학원 입학생 1684명 중 여학생은 53.9%였고 남학생 가운데 30%는 군필자였다. 의학전문대학원에서 배출될 의사의 70% 가까이가 공중보건의와 무관하다는 얘기다.

산부인과 가장 심각 … 전국 통틀어 14명

 진료과목별로는 산부인과와 치과의 상황이 특히 심각하다. 산부인과를 전공한 공중보건의는 전국을 통틀어도 14명에 불과하다. 김영길 경북도 보건정책과 주무관은 “저출산 추세와 여의사 선호 등으로 인해 남성 산부인과 의사가 줄어들고 있는 데 따른 결과”라고 말했다. 그런데 전국 기초자치단체 가운데 산부인과가 없거나 혹은 분만병원이 있어도 한 시간 이상 가야 하는 이른바 ‘분만 취약지’는 48곳에 이른다. 14명을 한 곳에 한 명씩 배치한다 해도 33곳이 비게 된다. 이에 따라 경북·경남·강원·전남지역은 산부인과 공중보건의로 하여금 이동진료를 하게 하는 ‘찾아가는 산부인과’ 사업을 펼치고 있다. 계약직 의사로 공중보건의 결원을 채우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으나 실적은 신통치 않다.

 수급불균형이 심한 치과 공중보건의도 대다수가 순환진료를 하고 있다. 한 보건소에 머무르지 않고 인근 농촌의 보건지소 여러 군데를 도는 것이다. 강원도 춘천보건소 소속 공중보건의 강길수(29)씨는 “순환진료를 나가면 이동거리도 멀고 진료해야 할 환자도 많아 마치고 돌아오면 기진맥진 상태가 된다”고 말했다. 경북도의 경우 보건소·지소가 242곳인데 치과 공중보건의는 67명밖에 없다.

공보의 의존하던 농어촌 병원들 폐업

 공중보건의 감소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곳은 농어촌지역의 민간병원과 노인전문요양병원 등이다. 보건복지부는 민간병원이라 해도 의료진 확보가 쉽지 않은 농어촌지역 병원들에 공중보건의를 파견해 왔다. 하지만 보건소·지소 등 공공의료기관에 투입하기에도 인력 사정이 빠듯해 지금은 민간병원에 공중보건의 신규 인력을 배치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응급의료시설을 갖춘 곳에 대해서만 예외를 인정한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병역을 대체하는 공중보건의가 민간병원에서 근무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옳지 않다”며 “민간병원들은 스스로 인력을 충원해 결손을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농어촌 현장의 실상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농어촌 민간병원 중에는 의사를 충원하지 못해 폐업하는 곳도 나오고 있다. 지난 한 해 폐업한 소규모 의원은 전국적으로 모두 1625곳에 달한다. 인구 2만3000명인 강원도 양구군의 경우 올해 초 관내에 있던 피부과가 문을 닫으면서 기존 3개이던 병원 수가 2곳으로 줄었다. 김중현 강원도 보건행정과 주무관은 “지자체가 직접 나서 유치 노력을 해도 들어오겠다는 병원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경북 의성군의 e의성병원은 지난해 건물을 다 지어놓고도 의사를 채용하지 못해 개원이 예정보다 5개월 늦어졌다. “최고 대우를 해 주겠다”고 공언하며 백방으로 뛰었으나 필요한 의사 9명 가운데 4명을 채용했을 뿐이다. 이런 현상은 의사들이 생활 여건과 자녀 교육 등의 이유로 농어촌 근무를 기피하기 때문이다. 한 민간병원 관계자는 “월급으로만 2000만원을 주겠다고 해도 의사들이 오지 않는다”며 “여태까지 공중보건의에 의존해 병원을 운영해 왔는데 앞으로는 그것도 불가능해졌으니 농어촌 의료 상황은 더욱 열악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복지부 “은퇴 의사 활용방안 고민 중”

 이런 현상이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지만 뾰족한 대책은 없다. 인력 수급 상황이 나아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밖에 별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의학전문대학원이 과거의 의과대학 체제로 복귀하기로 했지만 예전과 같은 수준의 공중보건의 인력을 확보하려면 10년 가까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이달 초 김한표(새누리당) 의원 등이 공중보건의 수급 불균형 해소를 위해 의대생 등의 입영 연기 상한 연령을 현행 30세에서 2년 연장하는 병역법 개정안을 발의한 상태이지만 근본적인 대책은 될 수 없는 실정이다.

 이 때문에 공중보건의에 농어촌 의료를 의존하고 있는 현행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박정배 보건복지부 건강정책과장은 “농어촌지역의 의사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과대학에 정원외로 학생을 뽑아 교육한 뒤 파견하는 장학의사제도나 도시지역에서 은퇴한 의사를 활용하는 방안 등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광역취재팀=서형식·최모란·최경호 기자

◆공중보건의=병역의무를 대신해 3년 동안 농어촌 등 보건의료 취약지역에서 공중보건 업무를 담당하는 의사를 말한다. 의과대학을 졸업한 일반의사나 전문의는 물론 한의사·치과의사 자격증 소지자도 해당된다. 주로 농어촌이나 산간벽지, 도서지방의 보건소나 보건지소 등 공공 의료기관과 119 상황실, 응급의료 시스템을 갖춘 일부 민간병원 등에 배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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