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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저 엔진 달고 중저가 일본 제품 몰려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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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5년4개월 만에 최고치 일본 증시가 5년4개월여 만에 최고치로 올라섰다. 15일 도쿄 시장에서 닛케이지수는 전날보다 2.29% 오른 1만5096.3을 기록했다. 닛케이지수가 1만5000 선을 넘은 것은 2007년 12월 28일 이후 처음이다. 전날 미국 뉴욕증시의 다우지수와 S&P500지수가 사상 최고치를 경신한 가운데 엔화 약세가 가속화하면서 강세장이 계속됐다. 도요타는 3.7% 올랐고 엔터테인먼트사업부 분리설이 나온 소니는 10%나 폭등했다. 이날 엔화가치는 달러당 102엔대 초반에서 움직였다. 일본 도쿄의 주식 전광판이 장중 15086.16을 표시하고 있다. [도쿄 AP=뉴시스]

“화려한 디자인의 고급 모터사이클(오토바이)을 기대하셨던 분들, 의아하시죠? 이번 제품은 동네에서 매일 보던 종류의 모터사이클입니다. 하지만 이 제품이 혼다 코리아의 새 성장 동력입니다.”

 15일 혼다의 상업용 모터사이클 ‘슈퍼커브’ 발표회장. 정우영 혼다코리아 사장은 전 세계에서 7600만 대 이상이 팔린 대표 상품을 ‘동네 오토바이’에 비유했다. ‘고급 오토바이’ 혼다가 중국집·세탁소·퀵서비스용 오토바이 시장에 뛰어드는 순간이었다. 혼다는 슈퍼커브를 동급 국산 제품과 비슷한 200만원 초반대에 판매할 계획이다. 정 사장은 “ 소상공인의 파트너가 되겠다”며 “매장도 지금(32개)의 두 배로 늘리겠다”고 말했다.

 엔저를 등에 업은 일본 기업이 판매 전략을 ‘고급 일제’에서 시장 확대를 노린 ‘보급형 일제’로 넓히고 있다. 상류층 시장에 더해 중산층 시장인 ‘볼륨 존(Volume Zone)’에서 파이를 키우겠다는 뜻이다. 볼륨 존은 신흥시장에서 급증하고 있는 중산층을 지칭하는 것으로, 중저가 제품의 대량 판매를 추구한다는 의미다.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엔저로 수익성이 좋아지면서 생긴 가격·마케팅 여력을 활용해 시장 기반을 넓히기 위한 전략”이라고 분석했다. 혼다코리아의 정 사장도 대림 등 한국업체와의 경쟁에 대해 “경쟁보다 파이를 키울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2만4000대 규모인 동급 모터사이클 시장에서 연간 5000대를 더 팔겠다는 전략이다.

 도요타도 볼륨 존 공략에 적극적이다. 도요타는 13일 크로스오버 차량인 라브4의 새 모델을 내놓으며 “‘양품염가(良品廉價)’를 적용해 가격을 책정했다”며 “수입 SUV를 넘어 한국산 SUV와 경쟁할 것”이라고 밝혔다. 라브4의 2륜 구동 모델 가격은 3240만원으로 국산 SUV와 맞붙어볼 만하다는 자신감이다.

도요타는 이달 초 캠리, 캠리하이브리드, 프리우스 등 주력 모델을 한 달간 300만원 할인해 판매하겠다는 발표도 했다. 쏘나타를 타는 한국 중산층을 공략하기 위한 이 전략은 먹히고 있다. 도요타 강남 전시장의 엄시용 팀장은 “10일까지 전월 대비 차량 출고는 2배로 늘었고 계약은 3배, 매장을 찾는 고객 수는 4배로 증가했다”며 “지난 주말에는 고객이 너무 많이 와 점심·저녁도 제때 못 먹었다”고 말했다.

 백화점 같은 고급 유통 채널만 고집하지도 않는다. 캐논코리아는 지난달 19일 세계 최소·최경량 DSLR카메라 EOS 100D를 출시하자마자 홈쇼핑으로 달려갔다. 1100대가 완판됐다. 메모리카드, 가방, 삼각대, 리더기 등 각종 사은품을 포함해 87만8000원에 팔았다. 동급 카메라는 90만원대 후반~100만원대다. 업계에선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기 위한 전형적인 보급형 제품 판촉”이라고 평가했다.

일본 화장품 1위 회사인 시세이도는 백화점 브랜드와 올리브영 등 드러그스토어용 대중 브랜드를 동시에 확장하고 있다. 이 회사의 대중 브랜드 세안제 ‘퍼펙트휩’은 출시 1년 만에 100만 개가 팔렸고, 이를 기념해 8900원짜리 제품을 1000원 더 깎아주는 할인 행사까지 하고 있다.

 이 같은 전략은 대중 시장 공략의 과거 성공을 통한 자신감의 표출이기도 하다. 일본계 신발 판매점인 ABC마트는 명동 신발 상권의 황제로 불린다. 2003년 10개였던 이 회사의 매장 수는 지난해 127개로 늘어났다. 유니클로 역시 세력을 확장해가고 있다. 회전스시점 ‘스시로’는 아예 처음부터 저가 전략으로 한국 시장을 두드리고 있다. 스시로의 가격은 국내 회전초밥집보다 30~50% 싸다. 총 4곳이던 매장이 최근 6곳으로 늘었고, 3곳이 추가 개장을 준비 중이다.

 중산층 볼륨 존 시장을 노린 일본의 공략은 국내만의 일이 아니다. 동남아 등에서 이미 2009년부터 일본 정부가 정책으로 이 전략을 밀고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아시아 중산층 시장이 2009년 5억 명, 49억 달러 수준에서 2020년 17억 명, 147억 달러로 커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안현호 한국무역협회 부회장은 “과거에는 일본은 고급 기술, 한국은 중급 기술, 중국은 하급 기술로 특화된 분업구조가 형성돼 있었다”며 “그러나 지금은 일본의 볼륨 존 전략 등으로 인해 3국 간 경쟁이 국내외에서 격화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최지영·김영훈·이지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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