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뉴스위크]특종: 최규선의 秘파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최규선은 왜 몰락했나

DJ 비서진 5인방으로 잘나가던 그가
왜 하루아침에 ‘정권의 혹’이 됐을까.
그의 부상과 추락과정을 추적한다.

“그는 나를 버렸다. 나는 이 정권과 DJ에게 피해망상 비슷한 걸 가지고 있다. 그들은 나의 모든 것, 정치에 대한 희망, 나의 친구들, 나의 인생까지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녹음테이프 속 최규선(42·미래도시환경 대표)씨는 이렇게 울부짖고 있었다.

97년말에서 98년초로 이어지는 정권 인수기, ‘2인자’ 소리까지 들었던 최씨의 몰락은 어떻게 진행된 것일까. 그는 정권 인수위 시절 이강래(민주당 의원), 장성민(민주당 전 의원), 고재방(교육부 차관보), 박금옥(청와대 총무비서관) 등과 함께 ‘비서진 5인방’으로 한창 잘 나가다가 두 차례에 걸쳐 사직동 내사를 받는 존재로, 결국 이 정권의 ‘혹’이 되었다.

최씨가 올 초부터 구속직전까지 준비한 자서전 자료 속에는 이 ‘정치적 몰락’의 비밀이 담겨 있었다. 9개의 녹음 테이프와 방대한 양의 사진 기록들, 그리고 서신, 팩스 문서로 되어 있는 이 자료 속에는 운명적이었던 DJ와의 82년 첫 만남에서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DJ 곁에서 정권의 핵심에 접근했다가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과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또 IMF상황에서 그의 국제적 인맥과 국내 정치·경제인들이 벌였던 숨막히는 로비전쟁의 실상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DJ는 정치적 야심에 가득 찼던 최규선의 인생 자체에 엄청난 빛과 그늘을 드리웠다. 최씨가 9개의 테이프에 담은 그의 일대기는 DJ에 대한 애정과 존경에서 출발해 한탄과 증오로 마무리되고 있었다.

최씨가 DJ를 처음 만난 것은 1982년 시카고에서였다. 최씨는 당시 외국어대 재학중 첫번째 연애에 반대한 부모의 등에 떼밀려 위스콘신 주립대학으로 떠났다.영어를 좋아하던 그는 경제학을 전공하면서 회화실력 덕분에 1년만에 국제학생회장이 되었다. DJ는 81년 가석방된 뒤 미국으로 망명한 상황이었는데,다른 한국 유학생 학생회장 서너 명과 함께 시카고의 한 호텔에서 만나게 된다. 그는 이 자리에서 DJ로부터 아주 강한 인상을 받았던 듯하다.

최규선과 DJ의 두번째 만남은 86년으로 건너뛴다. 대학원 진학을 앞둔 그는 GRE(美 대학원 입학용 영어시험) 시험준비를 핑계로 귀국했지만, 사실은 대선에 출마한 DJ를 자진해서 돕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DJ는 당시 가택연금 상태였는데, 미국에서 인연을 맺은 최씨는 이희호 여사와 김옥두 의원의 도움을 받아 경찰의 눈을 피해 동교동을 수시로 드나들었다고 한다. 이런 만남을 통해서 그는 DJ의 정치적 문하생이 되었다. 당시 DJ 곁에는 박지원 뉴욕 한인회장, 유종근 럿거스대 경제학과 교수가 있었다. 최씨와 유종근씨는 이때부터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된다. 이때 최씨는 DJ곁에서 백의종군했다.

1988년 최씨는 DJ선거운동중 종종 이용했던 서울- 광주간 비행노선에서 만난 두 살 연상의 스튜어디스 손미혜씨와 만나 가족들의 축복 속에 결혼식을 올리고 다시 유학 길에 오른다. 그리고는 스칼라피노 교수가 재직하던 캘리포니아대학(버클리)의 석사과정에 들어간다. 그는 스칼라피노 밑에서 7년간의 꽤 긴 대학 생활을 하게 된다. 스칼라피노 교수는 그에게 스티븐 솔라즈 전 하원의원, 컬럼비아 대학 교수출신의 백악관 대변인이었던 조지 스테파노풀로스, 키신저 전 국무장관 같은 미국 유력 정치인들을 소개했다.

“이 시기에 나는 공부만 한 것이 아니라 미국 내 휴먼 네트워크를 구축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대학원에서 배우는 공부 자체보다도 미국이란 사회를 충분히 경험하고 배워서 돌아가겠다는 열망이 더욱 컸다. 나의 관심사가 이러하다 보니 버클리에서도 한국학생보다는 미국학생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그리고 한국인 최초로 ‘마약퇴치운동 프로그램’ (D. A. R. E.)에 들어가 활동하게 되었다. 이 마약퇴치운동 프로그램은 당시 미국 정부가 마약과의 전쟁을 강력히 추진 중에 있었던 사회분위기에 힘입어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운동에 활발하게 참여했던 유명인사들로는 마이클 잭슨, 스티븐 스필버그, 엘리자베스 테일러, 조지 루커스, 말론 브랜도, 마이클 아이즈너(월트 디즈니사 회장) 같은 할리우드 스타들이 있었다.”

그러한 그의 노력이 결국 자신의 운명을 바꾼 마이클 잭슨과의 인연을 만들어내게 된다. 92년 5월 LA의 센트럴시티에서 마약퇴치운동을 위한 자선기금모금 파티가 열린 자리였다. 마이클 잭슨은 경호원들의 제지를 뚫고 ‘겁없이’ 다가간 그를 자신의 옆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김치이야기를 묻는 등 호감을 표시한 뒤 그의 전화번호를 물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어린 시절 자신을 다정하게 돌봐준 형수가 바로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마이클 잭슨은 한국인에 대해 상당한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 자리에 대해 “그날의 만남이 내 인생에 얼마나 큰 행운이 될 것인지는 짐작도 못했다”고 했다.

이 자리 이후 3개월이 지난 8월 중순께 최씨는 마이클 잭슨으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8월 29일 자신의 생일에 우리 가족을 초대하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는 샌타바버라행 왕복 항공권을 보내 왔다.”

마이클 잭슨의 대저택인 ‘네버랜드’ 게스트하우스에서 꿈같은 1박2일을 보낸 후 떠나는 최씨에게 마이클 잭슨은 엄청난 선물을 안겨준다. “그는 내가 꿈을 실현하는데 큰 힘이 되어주겠노라고 약속했다. 미국 대통령을 포함하여 누구라도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자신이 주선을 하겠다는 거였다. 헤어질 때는 학비에 보태 쓰라고 5만달러를 주기도 했다.”

마이클 잭슨은 최규선과의 약속을 지킨다. 그에게 조지 소로스와 알 왈리드를 소개해 준 것도 잭슨이었다.

최씨는 92년 대선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개인적인 사정도 있었고, DJ의 당선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이때부터 미국에서 같이 유학시절을 보내게 된 홍걸씨와 각별한 관계가 되는 것으로 전해진다. 객지에서 만난 이들은 서로의 심중을 터놓는 사이가 된다. 최씨는 홍걸씨에게 ‘보험을 드는 심정’으로 돈을 주고, 돈도 꿔주면서 가깝게 접근했던 것으로 보인다. 홍걸씨는 최씨에게 배다른 형들인 김홍일 의원과 홍업씨에 대한 서운한 심정까지 솔직하게 털어놓았을 만큼 신뢰했다.

최씨의 주선으로 96년 마이클 잭슨의 한국공연이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마이클 잭슨은 주변인사는 물론 쏟아지는 언론사와의 인터뷰마다 최씨를 ‘아주 친한 친구’로 소개했다. ‘최규선’이라는 존재가 언론사의 관심을 끌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 마이클 잭슨의 공연이 치러진 직후 최씨는 DJ의 부름을 받고 목동의 한 아파트 안방에서 만난다.

“이번 대선에서 자네가 나를 도와야겠네. 지난번처럼 외곽에서 나를 도울 게 아니라 이번에는 내 비서로 들어와서 나를 도와주어야겠어.”
DJ는 마이클 잭슨의 내한공연을 성공시킨 최씨의 역량을 높이 산 듯 국민회의 총재 비서로 임명한다. 97년 대선에서 최씨는 DJ의 해외담당 비서로 활약한다. IMF라는 절체절명의 위기는 최씨에게 ‘절대적인 찬스’를 만들어주었다. 선거기간 막판에 IMF와의 재협상 문제로 궁지에 몰린 DJ를 구한 것도 그의 아이디어였다. 그는 DJ와 소로스의 화상회의를 주선해 DJ를 국제적인 경제인이 인정하는 후보로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DJ의 당선이 확정된 후인 12월 20일 새벽 6시에 최씨는 DJ로부터 호출을 받는다. 일산의 2층 서재에서 DJ는 그에게 특명을 내린다.

“지금 우리 경제가 거의 아사상태라는 건 자네도 잘 알 거네. 당장 접촉을 해야 할 사람은 두 사람이다. 헤지펀드의 1인자인 조지 소로스와 직접 투자의 1인자인 알 왈리드 사우디 아라비아 왕자, 이 두 사람은 당신과 친하지 않느냐. 두 사람을 입국하게 해줘야겠네. 물론 우리 나라에 투자하는 걸 전제로 말일세.”

DJ는 최씨에게 친서와 함께 미화 3천달러를 주었다고 한다. 일종의 출장비인 셈이었다.

악착같은 최씨는 미국의 친구들을 총동원하다시피 해서 노스캐롤라이나의 별장에서 스키를 즐기고 있던 소로스를 찾아 DJ의 친서를 전달하고 한국에 데려오는 데 성공한다. 친서에는 불필요한 오해를 막기 위해 보좌역인 최씨를 메신저로 하겠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소로스는 사전에 DJ의 ‘옥중서신’ 영문판을 읽고 DJ를 지지하는 입장에 서있던 인사였다.

그런 작전을 거쳐 결국 조지 소로스와 알 왈리드는 한국을 방문하게 된다. 최씨는 DJ의 지시를 받아 알 왈리드로부터 대우와 현대에 각각 1억5천만달러와 5천만달러의 투자를 받아낸다. 최씨는 이때 소로스의 조언대로 데이콤과 SK텔레콤 등 우량주식에 투자를 해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한다.

당시 최씨에 대한 DJ의 믿음은 대단했던 듯하다.

“자네는 나와 청와대로 같이 들어가네. 어느 특정 부서를 맡기보다는 특정한 프로젝트를 진행할 경우가 많을 테니 광범위한 영역을 담당할 만한 자리를 찾아보세.”

이렇게 해서 DJ는 그를 청와대 상황실장으로 내정했었다는 것이다. 최씨는 당시 “규선이. 내가 40년 넘게 정치를 하면서 어느 정도 사람을 보는 눈이 있네. 자넨 앞으로 정치적으로 대성할 거네. 두고 보소”라는 ‘DJ의 정치적 확약’이 담긴 말을 듣게 된다. 이렇게 붕뜬 상태에서 그는 많은 적을 만들었다. 당선자 시절의 한 일화다.
DJ 주재로 김한길 인수위 대변인, 박지원 당선자 대변인, 정동영 당 대변인, 이종찬 인수위원장, 이강래씨, 김옥두 의원, 그리고 최씨가 참석한 회의가 열렸다. 최씨는 DJ의 지시에 대해 평소와 다름없는 자세로 답변을 했다. 그러자 김옥두 의원이 회의가 끝나자마자 이를 참지 못하고 “자네 말투가 그게 뭔가. 보자보자 하니까”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적 정치문화로 보면 한마디로 ‘천방지축’이었던 듯하다.

최씨는 결국 청와대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 엄청난 ‘설화’(舌禍)가 터졌기 때문이었다. 98년 초 당시 최씨는 마이클 잭슨의 북한 어린이 돕기 자선 공연을 극비리에 진행하고 있었다. 파바로티를 비롯한 세계적인 가수들과 유명인들이 참석하는 그 공연은 판문점에서 열릴 예정이었고 더욱 놀라운 것은 북한의 김정일을 초청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 정보를 알고 온 기자에게 그는 사실을 확인해주고 만다. 그것도 그 주역이 최규선이라는 이름과 함께. 이 사실은 국내 언론사는 물론 그날 밤 북한의 중앙방송에서도 보도하는 바람에 파란이 일었다. 실제 그 발표는 취임식장에서 당선자가 직접 언급함으로써 효과를 극대화시키기로 돼 있었던 사안이었다. 더군다나 앞으로 전개될 남북관계가 화해 및 교류와 협력이라는 내용까지도 보도되는 바람에 외교 안보팀이나 오랫동안 그 이론적 틀을 모색해온 전문가 그룹에서는 그의 발언을 절대 용서할 수 없다는 분위기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정치 경험이 일천했던 나는 기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전혀 몰랐다. 어디서 들었는지 집요하게 캐묻는 기자들에게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프로젝트의 희미한 윤곽만 알려주었을 뿐인데 일이 그토록 부풀려지고 그렇게 큰 반향을 가져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결국 최씨는 김중권 당선자 비서실장으로부터 청와대 비서실 스타팅멤버에서 빠져야 한다는 통고를 받게 된다. 대신 일단 당총재 보좌역으로 있으면서 적당한 시기가 되면 청와대로 들어오는 것이 좋겠다는 DJ의 언질도 전달받는다. 이때부터 그는 박지원 공보수석(현 비서실장)을 통해 일하라는 지시를 받게 된다.

그러나 그의 불운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98년 6월, 그는 그나마 유지하고 있던 당총재 보좌역의 자리마저 내놓지 않을 수 없었다. 루머로 떠돌던 외자유치 커미션에 관한 문제였다.

더구나 최씨는 삼성자동차의 투자 문제로 이건희 회장의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알 왈리드를 만나러 삼성의 임원들과 함께 사우디 아라비아로 간 것이 결정적인 사건이 되고 말았다. 알 왈리드와의 협상은 잘 진행되었지만, 삼성그룹을 지원하는 일은 DJ정부의 재벌정책과 어긋나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최씨는 98년 6월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야드에 삼성 간부들과 함께 이건희 회장의 친서를 들고 도착했다. 최씨는 당시 상황에 대해 “알 왈리드 왕자는 우리 일행을 장관급으로 융숭하게 대우해줬다. 이회장의 친서속에는 삼성자동차에 대한 열정이 그대로 나타나 있었다. 삼성에 대한 투자문제는 쉽게 마무리됐다. 알 왈리드는 스위스의 투자자문을 만나보라고 했고, 우리 일행은 바로 스위스로 날아갔다”고 했다.

삼성에 대한 투자유치문제는 손쉽게 해결됐던 듯하다. 그는 “알 왈리드는 스위스 시티 뱅크 안에 개인금고인 ‘프라이비트 뱅크’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갑부였다.이곳의 투자자문 마이클 잰슨과 투자방안에 대한 구체적인 조항들을 마무리한 뒤 우리 일행은 한껏 고무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하루 놀고 가자는데 합의했다”고 말했다.

그의 이런 행동은 정권 초창기 재벌정책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었다. 그는 그걸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후회스러웠다. 박지원 수석한테라도 보고했으면 됐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그 일로 인해 박수석으로부터 총재 보좌역 명함까지 들고 다니지 말라는 말을 듣게 됐다. 98년 9월 9일에 사직동팀으로 소환되어 다음날까지 꼬박 40시간 정도를 조사받게 된다. 이미 내 주변 인물들에 대한 계좌추적은 물론이고 세세한 비용 부분까지 다 드러나 있었다.”

그는 두 번의 내사에 대해 “사직동팀은 처음에는 외자유치를 하는 과정에서 거액의 커미션을 챙긴 혐의로 조사하다가 그게 여의치 않자 마이클 잭슨의 내한 공연을 빌미로 한 사기사건으로 수사의 초점을 맞췄다”고 주장한다. 구속직전 최씨는 박주선 당시 법무비서관의 지시에 의해 풀려나게 된다.

98년 9월에 풀려난 최씨는 이재만 당시 대통령 수행 비서의 지시를 듣고 바로 미국으로 떠난다. 미국에서 그는 다시 이재만 비서의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DJ가 김중권 비서실장에게 내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최규선의 공로는 당신도 알 것이다. 최규선이 미국에 가있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는 요지의 말이었으므로 조만간 당신에게 다시 연락을 할 것이다는 내용이었다”고 했다. 이말을 전해들은 최씨는 정치권 복귀의 계기를 만들려는 듯 다시 DJ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위해 뛰기 시작한다.

당시 상황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참 기이한 성격을 가진 것 같다. 이 무렵 나는 DJ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DJ같은 사람이 노벨평화상을 꼭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자비를 들여 무작정 노르웨이 오슬로로 떠났다. DJ측보다 먼저 오슬로에 들어간 나는 운데스타를 만나 노벨평화상 수상자 결정과정에 대해 상세히 알아본 뒤 해외심사위원들에게 결정 권한이 있다는 사실과 햇볕정책, 이산가족 상봉 등 남북화해 무드를 조성했다는 점이 높이 평가돼 DJ의 수상 가능성이 생각보다 크다는 걸 알게 됐다.”

그는 국제관계 로비스트인 솔라즈 전 의원 등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을 만나 DJ에게 우호적인 이야기를 전했다고 한다.

6개월후 이재만 비서와 통화를 해 귀국을 허가받은 뒤, 이 비서의 충고대로 당시 일본에 머물고 있던 권노갑 전 민주당 최고위원을 찾아가 만난다. 권씨는 그에게 “우산이 돼주겠다”고 약속했으며, 귀국후 최씨는 한동안 권씨의 비서로 있게 된다. 이후 권씨는 말썽 많은 최씨를 비서진에서 해임하게 된다.

최씨는 민주당을 통한 정계 입문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감지하며 홍걸씨 등 민주당 인맥은 ‘보험용’ ‘사업용’ 관계로, 한나라당은 자신의 정치적 재기를 위한 발판으로 삼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동시에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차게 된다. 그는 “권 전 위원의 캠프를 나온 뒤 나는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증권투자를 시작했다. 주변의 돈은 다 동원했다. 아내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커피숍을 운영하고 있어서 가족들의 생계는 문제가 없었다. 이때 나는 돈을 꽤 벌었다”고 했다. 이때 의기투합한 사람이 바로 이번 ‘최규선 게이트’의 핵심 인물인 김희완 전 서울시 정무부시장이다. 이 두 사람이 함께 홍걸씨를 비롯해 정치권에서 알게 된 인물들과 얽히고 설키면서 각종 이권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이번 사건의 핵심이다.
최씨의 정치적 야심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이회창 한나라당 전 총재의 해외담당 특보 자리를 노리고 윤여준 의원에게 접근한다. 이 전 총재의 방미활동을 돕겠다며 자진해서 나선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 전 총재의 방미활동을 도왔던 스티븐 솔라즈 전 미 하원의원은 얼마전 최씨가 이 전 총재의 방미활동에 대한 도움을 요청했음을 확인해주기도 했다.

최씨의 마지막 불행이 여기서 시작됐다. 최씨의 한 측근은 “비서인 천호영씨가 최씨 몰래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최씨에게 흥정을 해왔다”고 했다. 이 측근은 “천씨는 처음에는 4억5천만원을 요구하다가 다음에는 8억원, 그 다음에는 20억원을 요구해왔다”고 했다. 하지만 “돈에는 공짜가 없다”는 말을 지론처럼 해온 최씨는 과시를 위해 자신이 타고 다니는 차 속에 넣어둔 1백만원짜리 수표 다발을 쉽게 뿌리면서도, 비서진들에게는 늘 야박했다. 이게 화근이었다. 천씨가 3월 23일 최씨의 비리 문제를 경실련 홈페이지에 공개함으로써 ‘최규선 게이트’는 시작된다.

천호영씨와 최씨의 관계에 금이 간 것은 꽤 오래 전부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알려진 것처럼 최씨는 강남의 씨네시티 안의 매점인 피플엔시티를 운영하고 있었다. 1, 3, 4층의 매점을 소유하고 있었던 최씨가 사직동팀의 조사를 받고 6개월간 미국에 가 있는 동안 천씨가 관리 대리인 역을 맡았다. 최씨의 한 측근은 당시 상황에 대해 “최씨는 2층의 매점도 인수하도록 천씨에게 지시했는데, 천씨는 자신이 2층 매점을 직접 운영하겠다는 생각으로 건물주가 직접 운영하려 한다는 허위보고를 한 뒤 친척 명의로 이 매점을 직접 인수했다”고 한다.

수익전망이 밝으리라던 예상과는 달리 실제로는 전층 매점이 적자에 허덕였다. 게다가 천씨는 주식투자까지 하다가 많은 돈을 날려 심각한 채무에 시달렸다고 한다. 천씨는 수차례에 걸쳐 최규선씨에게 돈을 빌려줄 것을 요구했지만 피플엔시티 매점 건으로 감정이 상한 최씨는 이를 거절했다는 것이다.

결국 천호영은 야당의 실세인 L 전 의원과 손을 잡고 폭로전을 벌이게 됐다는 것이 최씨측의 주장이다.

이런 상황에서 청와대가 초대형 정치스캔들이 될 가능성이 높은 ‘밀항’을 권유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DJ와 홍걸씨, 그리고 최씨가 얽힌 이야기들이 공개될 경우 파장이 만만치 않을 것이기 때문인 듯하다.

최씨가 가지고 있는 갖가지 자료에 따르면, 그는 국제적인 인사들과 깊은 교류를 맺은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언행은 한국적 정치풍토에 적응하지 못하고 ‘신뢰받지 못할 인물’로 낙인찍히는데 결정적인 요인이 됐던 듯하다.

그는 자서전을 위한 녹음에 이런 말을 남겼다.

“DJ가 우스갯소리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아인슈타인이 한국에서 태어났으면 뭘 했을까. 피카소가 한국에서 태어났더라면 만화가라도 할 수 있었을까. 한국은 괴짜를 키워주는 풍토가 아니다. 코리안 스탠더드가 따로 있는 것이다. 그가 나를 재목감으로 본 것은 확실했으나(DJ가 나에게 보여준 애정과 관심의 눈길은 지금도 생생하다), 쓰기에는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임 도 경 뉴스위크 한국판 취재팀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