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진·김격식, 숙명의 남북 라이벌 시대 막 내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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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진(64) 국방부 장관과 김격식(69·대장·별 넷) 전 북한 인민무력부장의 8년에 걸친 라이벌 관계가 막을 내렸다. 북한이 13일 인민무력부장을 교체한 사실을 공개하면서다.

 2010년 12월 장관에 오른 김 장관은 취임 직후 집무실에 김영춘(77) 당시 인민무력부장과 김격식 4군단장의 사진을 걸도록 지시했다. “적장(敵將)의 생각을 읽기 위해선 항상 얼굴을 마주봐야 한다”고 생각해서다. 우리의 국방장관에 해당되는 인민무력부장은 김영춘이었지만 김 장관은 김격식에게 눈이 더 갔다. 김 장관이 3군사령관에 부임한 2005년 이래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계속 맞붙어왔기 때문이다. 카운터파트이자 라이벌이었던 셈이다. 김 장관은 짬 날 때마다 김격식의 사진을 바라보며 ‘저 사람이 오늘은 어떤 도발을 할 궁리를 하고 있을까’를 고민하곤 했다는 게 장관 비서실 관계자의 설명이다.

 김 장관이 2005년 4월 휴전선 이남 서부 지역을 담당하는 3군사령관에 부임했을 당시 김격식은 먼저 휴전선 너머 황북 평산의 2군단장을 맡고 있었다. 서울과 수도권을 공격대상으로 하고 있는 2군단은 북한군의 핵심 중 핵심 전력이다. 1994년부터 10년 넘게 이곳에 근무한 김격식은 눈 감고도 작전지시를 할 수 있는 정도로 우리 쪽 지리와 사정에 밝았다. 그래서 김 장관은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란 손자병법을 생각하며 김격식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김 장관이 19개월 만에 우리 군의 작전을 총괄하는 합동참모본부 의장으로 옮기며 둘의 관계는 정리되는 듯했지만 라이벌 관계는 이어졌다. 김 장관에 이어 5개월 뒤인 2007년 4월 김격식이 북한군의 작전총괄인 총참모장에 임명됐기 때문이다. 이 기간엔 2차 남북정상회담(2007년 10월)이 열리는 등 남북화해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지만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기가 온다’는 망전필위(忘戰必危) 정신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게 참모들의 이야기다.

  2010년 11월 연평도 포격전을 겪으며 둘의 기싸움은 더해 갔다. 김 장관이 2008년 합참의장에서 물러난 뒤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야인생활을 하는 사이 4군단장으로 이동한 김격식은 연평도에 포탄을 퍼부었다. 공교롭게도 연평도 포격 이튿날 김 장관은 국방부 장관에 올랐다. 그러곤 “북한이 도발할 경우 ‘선(先) 조치, 후(後) 보고’ ‘백배, 천배 보복’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지난해 11월 이번엔 김격식이 인민무력부장에 올랐다. 또다시 적장으로 만난 것이다. 이후 둘의 대립각은 더해 갔다. 북한이 핵실험을 하고, 한·미 연합 훈련에 반발하며 위기를 고조시키면서 남북 간 긴장은 고조됐다. 김 장관은 북한이 공포로 여기는 핵탑재 전략폭격기와 핵추진 잠수함 등의 파견을 미국에 요청하며 맞대응했다. “개성공단에 머무르는 우리 근로자들이 인질이 될 경우 특수부대를 투입해 구출하겠다”는 발언도 했다. 김격식도 개성공단 잠정 폐쇄 결정을 내리는 데 참여했던 멤버로 알려지고 있다.

 숙명의 라이벌이던 두 사람의 대결에서 김 장관이 먼저 칼자루를 내려놓을 뻔했다. 박근혜정부 출범 이후 새 국방장관에 김병관 후보자가 지명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 장관은 유임되고 김격식은 인민무력부장 임명 8개월 만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정용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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