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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 대통령, 방중 때 시진핑과 北 개방의 길 논의해야”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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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철 기자

황병태(78·사진) 전 주중대사는 외교가에서 ‘르네상스맨’(여러 분야에 능하고 관심도 많은 사람)으로 통한다. 중국어·일본어·영어에 능통하고, 경제학(서울대 학사), 행정학(하버드대 석사), 정치학(버클리대 박사)을 공부했다. 고등고시 외무과 합격 뒤 경제기획원 경제협력국장(1967~70)을 지냈고, 한국외국어대·경산대·대구한의대 총장을 역임했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발탁으로 통일민주당 부총재(1987~88)와 13·15대 국회의원으로도 활동했다. 그는 93년 주중대사로 한·중 관계의 초석을 닦아 장쩌민(江澤民) 당시 중국 국가주석에게 ‘영원한 주중대사’라 불리기도 했다.

 그런 그가 팔순을 앞두고 책 『침몰하는 자본주의 회생의 길은 있는가』(이하 『침몰하는…』)란 책을 지난달 30일 펴냈다. 다시 경제 문제에 천착하고 있는 그를 8일 논현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사무실엔 『이코노미스트』『포린어페어스』 『아주주간(亞洲週刊)』 등 최신 해외 잡지와 책이 쌓여 있었다.
 
 -『침몰하는…』이란 책을 냈는데.
 “세계 경제가 어렵다. 성장이 안 되는 데다 소득 불균형으로 빈부격차가 심하다. 어떤 이는 자본주의가 끝나는 것 아니냐고까지 한다. 그런데 경제학은 이런 상황을 해결하지 못하고 금융 공학에만 골몰한다. 2008년 리먼브러더스 사태가 벌어진 뒤 영국 런던정경대에 세계적 경제학자들이 모이자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물었다고 한다. ‘왜 아무도 그 일을 예고하지 못했나.’ 순간 정적이 흘렀다고 한다. 경제학 무용론까지 나오는데 과연 새로운 자본주의를 만들 수 있을까란 생각에 이 책을 썼다. 경제학은 시장과 금융만 신경 쓸 게 아니라 개인과 사회, 정부와 국가, 재정과 금융, 생산과 소비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 또 금융 자본주의를 산업 자본주의로 바꾸지 않고는 살길이 없다는 게 이 책의 메시지다.”

 -책에서 중국식 국가자본주의에도 주목했는데.
 “중국은 사회주의 정치와 자본주의를 결합해 어떤 이들은 변종이라고 한다. 하지만 중국식 국가 자본주의도 경쟁력을 갖고 있다. 미국 자본주의에선 수십만 명이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고 교육도 무너지고 재정도 약해졌다. 반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중국식으로 경제를 이끌겠다고 하는데, 중국이 깨끗한 정부와 법치만 이뤄내면 싱가포르의 리콴유(李光耀·전 총리) 모델로 갈 수 있다.”

 -국내에선 경제민주화 입법이 활발하다. 한국 자본주의는 어떤 상황인가.
 “서구 자본주의와 중국식 국가 자본주의와는 또 다른 게 바로 한국 자본주의다. 한국은 정부와 기업, 시장이 삼위일체 모델을 유지하고 있다. 이 원조가 박정희 모델이다. 지난 대선에선 김종인 전 경제수석이 경제민주화를 주장했는데, 사실 어색한 용어다. ‘무엇의 민주화’냐는 거다. 경제민주화는 결국 기업과 시장이 같이 가는 게 아니라 정부가 앞장서고 기업이 따라오게 하는 거다. 하지만 박근혜정부도 점차 복지는 정부가 하되 성장 문제는 기업 몫으로 돌리지 않을까 싶다. 한국은 서구와 닮아가고 있지만 서구처럼 시장 중심이거나 중국처럼 국가 중심이 아니다.”

 -경제기획원 시절 특명전권대사로 미국을 다녀오는 등 박정희 전 대통령과 인연이 깊은데.
 “박정희 전 대통령은 보릿고개를 넘기 위해 최선의 방향으로 경제를 개발하는 효율적인 방식을 발명했다. 박 전 대통령의 경제 모델은 창조적 패러다임으로 봐야 한다. 그런 생각에서 『박정희 패러다임』이란 책도 썼다.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가 한 일을 잘 아니 부친이 한 것에서 보완만 하면 된다.”

 -박근혜 대통령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건가.
 “사실 박 대통령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외교와 통일 문제다. 박 대통령이 어제(7일) 미국에서 한 인터뷰를 보니 ‘중국과 러시아도 (북한에 대한) 우리 방식에 대해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 말했던데 이는 잘못이다. 박 대통령이 ?미국의 아시아 재균형(rebalancing) 정책이 좋은 일?이란 취지로 말했지만 중국이 들으면 좀 그럴 (불쾌할) 거다(※중국은 미국의 아시아 재균형 정책이 중국을 포위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경계해 왔다). 북한 문제에선 중국도 미국 못지않은 위치에 있다. 박 대통령은 북한을 제2의 미얀마로 만들어야 한다. 북한에 ‘너희가 살려면 경제를 개발해야 한다. 한국과 중국이 돕겠다’고 촉구하면서 중국과 함께 문제를 풀어갈 수 있어야 한다.”

 -다음 달 중국을 방문할 예정인 박 대통령에게 조언한다면.
 “북한이 개혁·개방의 길로 나아가도록 하는 방안을 시진핑 주석과 논의해 보라는 거다. 사실 북한의 비핵화 문제를 안 꺼내고 ‘제2의 미얀마로 가자’고 하면 ‘일반적 논의와 동떨어져 있다’는 말을 듣는다. (그렇더라도) 나는 북한이 개혁·개방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보는데 그게 미얀마 모델이다. 시진핑이 전적으로 도와줄 거다. 미얀마가 정치범을 풀고 경제개발을 한 것처럼 북한도 개방부터 해야 한다.”
 (※황 전 대사가 ‘제2의 미얀마 모델’을 언급한 다음 날 오전 “오바마 대통령이 ‘북한이 미얀마 모델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에 황 전 대사는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와 “박근혜 대통령이 그동안 주장해 온 ‘큰 외교’라는 것도 오바마의 발언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추가 설명을 했다.)

 -권영세 신임 주중대사, 구상찬 상하이 총영사 등 박근혜정부의 대중 라인업은 어떻게 보나.
 “직업 외교관은 아니고 정치인들인데 박 대통령 본인 뜻을 전달하는 매개로 두 사람을 활용하겠다는 뜻일 거다. 과거 장쩌민이 나를 ‘영원한 주중대사’라고 평가한 건 어려운 시기에 (내가) ‘(한국이)미·중 사이에 등거리 외교를 해야 한다’란 말을 했기 때문이다. 중국이 북한을 끌어안고 있으니 등거리 외교란 말을 쓴 거다. 내가 볼 때 6자회담은 흘러간 노래다. 박 대통령이 미국뿐 아니라 중국과도 지정학적인 동반자 관계가 돼야 한다.”

 -박 대통령은 자주 보나.
 “대통령 당선 전에 몇 번 봤는데 (박 대통령은) 주로 듣는다. 박 대통령은 여러 경험이 있다 보니 선입관이나 고집이 있을 수 있다.”

 -YS의 발탁으로 정치권에 입문했는데.
 “YS는 시대 흐름을 잘 본다. 하지만 지난해 식사 자리에서 만난 뒤론 아직 보지 못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과도 가까운데.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수출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게 한 사람이 김우중씨다. 박 전 대통령은 처음엔 수출에 대한 인식이 없어 ‘철강을 만들어도 국내 수요가 없는 걸 어떻게 하나’라고 걱정했다. 난 ‘세이의 법칙’(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는 법칙)을 얘기했고, 김우중씨도 그 롤모델이 됐다. 김우중씨는 씨를 너무 뿌렸는데 뒤에서 거둬줄 사람이 없었던 경우다. 『아주주간』에 따르면 베트남이 ‘중국의 미래 모델이 되겠다’고 표방하는데 김우중씨가 베트남에서 사관학교를 하는 건 그런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요즘 근황과 앞으로의 계획은.
 “책을 많이 읽으니 치매는 안 걸릴 것 같다. 아침 6시에 일어나 밤 12시까지 중국 잡지 등을 보는데 일본 『문예춘추』에서 후나바시 요이치가 쓴 걸 꼭 읽는다. 중국어·일본어·영어 사전을 보는 것도 큰 힘이다. 『침몰하는…』의 일본·중국·미국판 번역을 내고 싶은 욕심이 있다. 또 중국의 역사·지정학적 문제를 심층적으로 보는 『중국』이란 책을 쓰고 싶다.”

백일현 기자 keysm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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