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한 갑 … 직원수첩에 '우리는 을' 새기기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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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의 횡포’가 잇따라 불거지면서 갑으로 분류되는 기업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승무원 폭행사건으로 홍역을 치른 포스코에너지는 이달 말까지 모든 임직원에게 사내 회식은 물론 개인적인 술자리도 자제할 것을 권고했다. 이 회사 관계자는 9일 “깊이 반성도 하고 조직 문화도 쇄신하기 위해 자숙의 시간을 갖자는 의미”라고 말했다.

남양유업은 모든 영업사원을 대상으로 일과 시간 후 1시간가량 예절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남양유업 관계자는 “전화 응대는 물론 거래처나 대리점 방문 때 지켜야 할 각종 예절 교육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거래처나 협력사 등 이른바 을과 교류가 빈번한 식품이나 유통, 자동차 업계 등도 몸조심 중이다. 한 식품업계 관계자는 “뿌리 깊은 갑을 문화에서 자유로울 기업이 어디 있겠느냐”며 “요즘은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니 무조건 조심하자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갑을을 뒤집어 아예 을을 자처하거나 갑을이란 단어를 쓰지 않는 곳도 있다. 롯데마트는 직원용 수첩 맨 앞에 ‘우리는 을이다’라는 문구를 새겨놨고 계약서에도 본인들을 ‘을’로 협력사를 ‘갑’으로 표기하고 있다. 신세계그룹은 10여 년 전부터 회사 문서에 갑이나 을이라는 표현 대신 ‘구매자와 공급자’ 또는 ‘임대인과 임차인’ 등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갑을문화가 만연해 있는 건설업계에도 변화 움직임이 일고 있다. 18개 건설단체들의 모임인 대한건설단체총연합회는 지난해 건설산업 문화 선진화 추진 계획을 수립했다. 수퍼갑으로 군림하는 발주기관과 원도급, 하도급 등 단계적으로 이어지는 갑을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윤리경영 매뉴얼을 발간하고 공생 발전 노력을 펼치겠다는 거다.

 하지만 갑의 위치에 있는 국내 기업들의 태도는 협력업체를 ‘비즈니스 동반자’로 보는 외국 기업에 비해 여전히 미흡하다는 지적이다. 세계적인 커피전문점 기업인 A사는 최근 유기농 녹차가루를 납품받는 국내 업체에 대한 실사를 실시했다. A사는 실사 1주일 전 실사단의 방문 일정을 알렸고 항공·숙박료는 물론 모든 식사비를 자체 부담했다. 국내 업체 관계자는 “실사 후에는 더 안전한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개선해야 할 점을 서로 공유하고 떠났다”며 “A사에서 바람직한 갑의 모습을 봤다”고 말했다.

장정훈·구희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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