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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영희의 사소한 취향

'을'로 사는 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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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대학 졸업 후 잠시 몸담았던 광고회사의 상사는 을(乙)의 ‘알파요 오메가’와 같은 분이었다. 광고주의 어떤 무리한 요구에도 유쾌하고 유연하게 대처해내는 모습에 감복한 신입사원에게 그는 어느 날 메모 하나를 건넸다. ‘을로 사는 법’. 자세한 내용은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잊히지 않는 구절이 있다. ‘업무상 을로 살아가는 나와 ‘진짜 나’를 혼동하지 말 것.’

 다들 갑(甲)을 원한다지만 때론 을로 사는 게 편한 이도 있다. 일본 작가 마쓰야마 하나코의 만화 『잘해주지 마』(애니북스)의 주인공 유이치가 그렇다. 그는 타고난 소심함과 상냥함으로 누구에게나 친절을 베푸는 ‘천사표’다. 혹시라도 자신 때문에 상대의 마음이 상할까,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그런데 그의 지나친 배려는 본의 아니게 상대방에게 묘한 ‘뒤끝’을 남긴다. 업무에 서툴러 야단을 맞는 후배를 감싼다며 그는 후배를 대신해 모두에게 항변한다. “모리가 열심히 한다는 건 보면 알잖아! 의욕은 있지만 능력이 따라주지 않는 것뿐이야!” 프로젝트의 성공을 직원들의 노력과 팀워크 덕으로 돌리는 사장님께는 공손히 답한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저희의 원안은 흔적조차 없는데요 뭘.” 이런 식이다.

만화 『잘해주지 마』의 한 장면. [애니북스]

 한국판 단행본에는 이런 해설이 붙었다. ‘유이치, 그가 베푸는 것은 친절인가, 빅엿인가?’ 유이치는 언제나 을의 입장에서 모두를 대하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행동은 자꾸 ‘갑질’이 되어 버리는 셈. 우리 주위에도 한 명쯤은 있을 법한, ‘한없이 착한데 왠지 민폐’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소소한 에피소드를 이어가는 작가의 센스가 놀랍다. 만화가 마쓰야마는 남자 간의 사랑을 그린 ‘BL(Boy’s Love)물’로 유명한 작가인데, 그동안의 작품에서 살짝 보여줬던 독한 개그감각을 이 작품에서 제대로 펼쳐 보인다.

 을로 사는 법은 다양하다. 드라마 ‘직장의 신’ 미스 김처럼 실력으로 무장한 당당한 을이 된다면 최고일 게다. 그럴 수 없다면 옛 상사의 조언처럼 ‘일터에서의 나’와 ‘내 인생의 영원한 갑인 나’를 구분하는 균형감각을 갖출 필요가 있겠다. 하지만 둘 다 쉽지 않을 때 우리의 ‘민폐남’ 유이치군에게 힌트를 얻어보는 건 어떨까. 프로젝트 실패의 책임을 지고 회사를 떠나려는 부장에게 그는 달려가 애원한다. “부장님! 그만두신다니 말도 안 됩니다. 혼자서 회사를 움직여왔다고 생각하신다면 오산입니다!” 듣는 갑에게 ‘왠지 열 받지만 반격하기 힘든데?’라는 느낌을 갖게 만든다면, 그래서 “나한테 제발 잘해주지 마!”라는 반응을 끌어낸다면, 성공이다.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