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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년 흘러간 뉴스의 주인공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한해가 저물어 갈 무렵이면 누구나 생각키는 일이 있게 마련. 그런 중에도 어쩌다 사회의 이목을 한몸에 이끌었던 「뉴스·메이커」들. 그들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스포트·라이트」를 비춰보자.
「67년 이야말로 나와 경찰이 겪은 최고수난의 해였을 겁니다.」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신규한(50)씨의 첫마디
「홍제동 한 여인 사건」의 진범으로 몰려 29일 동안이나 옥살이를 하다 검찰의 무협의 불기소처분으로 풀려 나온 신씨는 자신을 「고문수사의 대표적 희생자」라고 잘라 말했다.
신씨는 자신이 석방 된 이후에도 부산 근하군살 해사건의 전진렬 군, 옥수동 사건의 전병석씨 등 모두가 경찰의 일방적인 암시와 유도에 의해 죄 없이 자백을 강요받아 거짓범인 노릇을 했다는 보도를 볼 때마다 「그들도 나와 같이 당했구나」하는 애처로움보다 스스로 분노에 못 이겨 몸을 치떨곤 했다고 한다.

<가족들도 두문불출>
「단지 범행시간 전후의「알리바이」를 제세하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경찰이 주먹구 구식으로 증거 없는 범인을 계속 잡는다면 경찰의 체통이 말이 아니거니와 그보다도 시민들로부터의 불신감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 입니까?」고 반문했다.
자신은 물론 홍제동 사건의 유모씨 형제등 숱한 용의자들의 인권은 누가 어떻게 지켜 줄 것이냐고 그는 따졌다.
비록 누명은 벗었지만 지금도 신씨와 그의 가족들이 겪는 어려움은 한두 가지가 아니라고 한다.
사건이 전부터 6년 동안이나 비교적 여유 있게 경영해 오던 연탄가게는 동리 사람들의 손가락질로 단골 손님이 한집 두 집 발길이 끊겨 문을 닫아야만했고 지나는 사람마다 「이 집이다」「저 사람이다」하며 수군거리는 바람에 한동안 가족들이 밖에 나가기조차 꺼려야 하는 곤욕을 당해야만 했다.

<학교가도 수군수군>
그 보다도 더욱 신씨 부인 박정수(37)씨의 마음을 찢어 놓은 것은 중학교와 국민학교에 다니는 어린 남매가 급우들의 손가락질을 견디다 못해 울며 집에 돌아왔을 때였다고 한다.
「어근들은 고문에 못 이겨 당한다지만 이에 따른 어린 자식들의 억울함을 생각하면…」하고 울먹였다.
신씨는 자신이 16년 동안 몸담았던 경찰로부터 받은 충격에서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듯 말을 잇지 못하고 얼굴이 파리해졌다.
그는 석방직 후 극도로 쇠약해진 몸을 돌보러 고향인 충북 옥천에 잠시 내려 간 것 이외에 아직도 홍제동274번지의 조그만 가게 방을 지키고 있다.
억울한 누명과 고문은 그의 사업과 함께 가족면회가 금지 된 구치소 독방에서 그의 건강을 앗아갔지만 다시 조그만 석유판매소로부터 우선 식생활만이라도 해결하고 싶다고 한다.
사건을 치르는 동안 변호사 비용을 대느라 얻어 쓴 빚으로 집은 모조리 세를 주고 가게에 이은 비좁은 단간 방에서 6식구가 가게일에 매달리나 장사도 여전히 되지 않은 다고 안타까와한다.
다행히 파월 맹호 부대에 근무하는 2남(25)씨가 메달 30(달러)씩 꼬박 부쳐와 크게 도움을 받고 있다고 한다.
신씨 자신은 경찰 재직시 익힌 무선통신기술을 되살리려고 틈틈이 관계서적을 두적이나 요즘은 날씨가 추워지나 다시 손발의 마디마디가 저리고 드이 쑤셔 줄 곧 자리에 누워지내는 형편이라고

<아직도 형사 그림자>
요즘도 가끔 형사들이 찾아와 동정을 살피는 것이 「못마땅해」 거의 밖에 나가지 않고 신문 「라디오」로 바깥일을 알고 지낸다는 신씨는 이해가 지나고 몸이 조금이라도 회복되면 수위자리라도 칮아 나서야겠다고 말한다.
「경찰관을 원망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고문 자체가 중대한 범법행위라는 것을 깨닫지 않고 있단 강력사건수사에 초조한 나머지 증인이나 목격자를 용의자로 둔갑시키는 경찰은 스스로가 연출한 (자백, 번복, 석방)극의 초라한 주인공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경찰의 과학수사를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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