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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현인, 돌아본 60년 무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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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에 잡지 '삼천리'에서는 가수들에 대한 대대적인 인기투표를 실시했다. 여러 달에 걸친 독자 투표 결과 인기가수 1위로 선정된 사람은 바로 현인. '방랑시인 김삿갓'의 폭발적인 유행으로 인기가 급상승한 신진 명국환과 10년 가까이 현인과 치열한 라이벌전을 펼쳐 온 '가요황제' 남인수가 근소한 표차로 각각 2, 3위에 올랐다. 비록 한 차례 실시된 인기투표 결과이기는 하지만, 50년대를 대표하는 가수 현인의 위상을 여실히 보여 주는 것이었다.

지난 13일 83세로 타계한 현인은 30년대 채규엽, 40년대 남인수의 뒤를 이어 50년대 가요계를 주도한 가수였다. 아버지가 대판매일신문 서울지국을 경영하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교회 성가대를 통해 음악에 눈을 뜬 그는 일본 유학을 거쳐 제법 규모가 컸던 성보악극단 음악선생을 맡아 처음 무대에 섰고, 중국 상해에서 3년간 활동하다 광복을 맞아 귀국해서 본격적으로 국내 가요계에 등장했다. 특이하다면 특이할 그의 이러한 이력 탓에, 근대 상해의 역사를 연구하는 어떤 학자는 40년대 상해 문화계의 생생한 모습을 증언해 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국내 인물로 가수 현인을 꼽기도 했다.

1947년부터 국내 무대에서 활발한 활동을 시작한 현인은 국제적인 도시였던 상해에서 익힌 감각을 바탕으로 그때까지 비교적 생소한 영역으로 남아 있던 구미권 가요를 소개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독특한 노래뿐만 아니라 헌칠한 외모로도 돋보였던 그는 1948년에 국도극장에서 개봉한 영화 '푸른 언덕'의 주연을 맡기도 했다. 장안에 일대 화제를 몰고 온 가수 현인이 첫 음반을 낸 것은 1949년 4월. 광복 이후 새로 설립된 럭키레코드 제1회 작품으로 발매된 '신라의 달밤'이 그의 음반 데뷔곡이었다.

1949년 가요계를 완전히 판쓸이하다시피 한 '신라의 달밤' 이후 이듬해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1년 동안, 럭키레코드를 통해 발표한 '남국의 처녀'(번안곡 '베사메무쵸'의 음반 발표 당시 제목), '럭키서울', '비 내리는 고모령', '고향만리', '애정산맥' 등의 연이은 성공은 우리나라 80년 가요사에서 거의 전무후무하다고 할 수 있는 경이로운 히트의 연속이었다.

아직 음반 생산시설이 충분하지 못했던 그 무렵 가수들의 주요 활공공간이었던 무대공연에서도 현인의 인기는 치솟았다. 음반으로 미처 소화하지 못한 신곡들을 소개하는 발표회에서는 그 자리에서 아예 현인이 부르는 노래를 외워 버리려는 관객들의 집요한 요청 때문에 같은 노래를 열 번도 넘게 재창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럭키레코드에 소속된 현인과 아세아레코드 소속으로 있던 남인수가 정면으로 노래 맞대결을 펼친 1950년 '은방울쇼'는 지금껏 전설적인 무대로 기억되고 있다.

'굳세어라 금순아', '인도의 향불', '불국사의 밤' 등 여전히 불리고 있는 노래들을 통해서도 인기가수 현인의 위상을 충분히 가늠해 볼 수 있지만, 그는 그냥 인기가 많은 가수에 그친 것이 아니라 이후 60년대로 이어지는 50년대 가요계의 새로운 흐름을 이끈 선구적인 가수였다. 수많은 외국곡, 특히 샹송을 번안해 불렀고 맘보, 탱고 같은 리듬에 보다 많은 비중을 두는 곡으로 유행을 선도했다. 시인 박인환이 지은 가사로 유명한 '한국적 샹송'의 대표작 '세월이 가면'(음반 발표 당시 제목은 '세월은 가고')을 처음 취입한 것도 현인이었다. 또한 그는, 한때 작품 도용 시비에 휘말리는 불미스러운 일이 있기도 했지만, 본명 현동주로 심심치않게 작사, 작곡을 하기도 한 싱어송라이터이기도 했다.

50년대 대중잡지에 다른 어떤 가수보다도 많이 등장한 사람 역시 현인이었다. 그의 이력, 그의 결혼, 그의 여성관, 그의 염문설 등이 수시로 잡지 지면을 장식했고,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고향만리'가 미국에서 번안되어 음반으로 나왔다는 소식도 우리 가요계의 지평을 넓혔다는 찬사를 받으며 언론에 등장했다. 심지어 영화배우들이 거의 독점하고 있던 잡지 화보에 모델로 나서기도 했으니, 그는 진정 당대의 스타였다.

60년대 중반 이후 현인이 새로 발표하는 노래는 거의 들을 수 없게 되었지만, 당대의 인기가수를 지나 원로가수가 되어서도 그는 여전히 매력적인 가수였고 멋쟁이였다. 광복 이전에 활동을 시작한 1세대 가수들 가운데 상당수가 세상을 뜨고, 남은 사람들 가운데에도 거의 은둔하다시피 하는 이들이 많은 상황에서도 그는 변함없이 세련된 모습으로 무대에 섰고 독특한 목소리로(물론 전성기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노래를 불렀다. 몇 해 전 한국 최고의 가수를 선정하는 설문조사에서 현인이 9위에 올랐던 것에는 우선 물론 50년대를 대표하는 가수라는 가요사적 위상을 반영한 점도 있겠지만, 한편으로 성실한 자기관리로 대중에게 실망스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그의 가수다운 태도에 힘입은 바도 있었을 것이다.

사람은 가고 노래는 남는다 하지만, 봄비를 맞으면서 충무로 걸어갈 때 그저 노래 '서울야곡'만 떠오르지는 않을 것 같다. 그 노래를 남기고 엊그제 세상을 떠난 현인은 노래를 부른 가수일 뿐만 아니라 바로 노래 속에 언제나 살아 있는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준히 사이버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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