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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중공서 이렇게 추방됐다"|북평 주재 「인도네시아」참사관|홍위대에 갇혀 닷새|「좋지 않은 인물」로 통고·경찰선 처자 심문|외교 특권 무시·식사도 불허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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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편집자주】중공은 지난 4일 북평 주재 인니대사관의 「바론」대리대사와「스마르노」참사관을「기피인물」로 추방한 적이 있었다. 홍위병들의 난동이 한창인 때라 이 두 사람에게도 예의 없이 그들의 화살이 겨누어졌다. 다음은 「스마르노」참사관의 체험기인데 중공에 있어서의 외교관에 대한 폭거가 얼마나 무모한 것인가를 엿보이게 한다.

<「스마르노」씨의 체험기>
중공에선 이른바 「외교특권」로 공분에 지나지 못했다. 외교관이라 해도 중공정부당국이 눈의 가시로 여기면 그가 어떤 곤경에 빠질지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지경. 예를 들면 「네덜란드」의 대리대사는 기피인물로 통고받았으나 지금껏 자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 대리대사는 외교관의 신분을 증명하는 「카드」를 뺏긴 채 벌써 6개월이나 연금상태에 놓여 있다.

<「기피 인물」통고>
지난 4월 24일 하오 2시쯤 나는 언제나 하는 것처럼 점심을 먹은 후 자동차로 처와 함께 대사관으로 돌아왔다. 때마침 대사관 건물 앞에는 많은 홍위병들이 웅성거리며 「인도네시아」에 대한 욕을 큰소리로 퍼붓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보다 『산적같은 놈』『개새끼』하며 매도했다. 일부 「데모」대원들은 한자와 영자로 『수하르토와 「나수리온」을 교수형에 처하라』라고 대서특필한 「플래카드」를 뒤흔들어 보였다.

<새벽부터 난동대>
이날 하오 5시, 우리 대사관의 「바론·스탄지사스트라」대리대사가 중공외교부에 불려 대리대사와 내가 중공에 있어서 「좋지 않은 인물」이라는 통고를 받았다. 중공외교부 당국자는 우리 두 사람이 중공과 「인도네시아」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원인이 되는 활동을 했다고 말했다는 것.
그래서 우리 두 사람은 5일안에 중공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게 됐다. 다음날 25일 반「인도네시아」「데모」가 또다시 대사관 앞에서 벌어졌는데 그 전날보다 더욱 심한것이었다. 대사관을 출입할 수 없는 것은 물론, 「데모」대의 소음으로 실내에서도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없다. 격렬한 「데모」는 26일에도 꼭두 새벽부터 야밤중까지 계속 됐다.
「인도네시아」대사관 주변의 건물벽과 지붕에는 대형「스피커」가 설치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욕설을 퍼부었다.

<습격당한 내처자>
이날 북평의 공인대회당에서는 대집회가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공안부장 사부치는 『모택동주석의 적기를 높이든 7억 중공인민이 「인도네시아」인민의 배후에 있기 때문에 「인도네시아」는 멀지않아 공산주의 국가가 될 것이다』고 큰소리 치고 있었다.
바로 그날 내처와 15세 난 내 아들은 차를 타고 북평 거리를 지나치다 폭도의 습격을 받았다. 폭도들은 차를 둘러싸고 유리창을 부쉈으며 「엔진·보네트」와 꼭대기에 기어 올라가 난동을 부렸으며 마지막에는 차를 뒤엎으려고 했다.

<아내 몸 만신창이>
놀란 처와 아들이 차 밖으로 뛰어내리자 이번에는 폭도들의 발굽에 집밟힐 지경이 됐다. 처는 그동안에도 몸의 여기저기를 발로 채고 꼬집히고 자빠져 만신창이의 몸으로 「호텔」에 돌아왔다. 간신히 「호텔」로 돌아온 처에게 한 경찰이 『너희들은 문화혁명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면서 심문했다. 27일 「데모」대의 소동은 한층더 격화되고 폭도들의 수도 더욱 불어났다.
대사관의 모든 차는 물론 「인도네시아」요인의 자가용차의 거의 전부가 앞 유리창을 비롯해서 창이란 창은 모두 「페인트」나 「슬로건」을 쓴 종이로 풀붙여 운전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북평 시내의 두 개의 큰 「호텔」앞에 주차하고 있는 몇대의 영업용 「택시」도 「인도네시아」대사관원은 태우질 않았다.

<기거도 대사관서>
따라서 우린 대사관원 중 먼곳에서 통근하던 사람들은 의류와 그밖의 일용 비품을 가져와 대사관내에서 기거 했다.
6월 29일은 토요일인데 우리 두 사람은 북평을 떠나야만 했다. 공항까지 우리들을 전송해 주기로 한 대사관차가 시간이 돼도 나타나지 않는다. 5분, 10분, 15분이 지났다.
우리 대사관의 숙소에서는 가는 자와 보내는 사람이 모두 불안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뺨에 침까지 뱉고>
얼마후 우리 가족네명은 북평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 다다르니 거기에도 노기에 찬 「데모」대와 군중이 기다리고 있었다.
공항입구에서 대합실까지의 통로 양쪽에는 2열 종대로 「데모」대원들이 줄지어 우리 일행을 보고 고함을 지르며 욕설을 퍼부었다. 대합실에 들어서자 이들은 우리를 빽 둘러쌌다. 『수하르토와 나수티온을 교수형에 처하라』『혈채는 피로 갚지 않으면 안된다』고 외치는 친구들의 입에서 튀어나온 침이 내 뺨에 묻곤 했다.

<고마운 서방 외교관>
어떤 「데모」대원들은 큰 주먹을 내 코 끝에 갖다대며 당장이라도 때릴 기세였다.
나는 다만 입술을 깨문 채 그들을 쏘아보는 것외에는 별 도리가 없었다.
그럴 즈음 우리들 일이 걱정되어 공항에 전송나온 동료외교관들이 몇몇 있었는데 그들은 우리곁에 접근 할 수조차 없었다. 한사람의 「인도네시아」대사관원이 이같은 「데모」대의 횡포를 「카메라」에 담은 것 같았는데 「카메라」는 뺏기고 「필름」은 압수됐다.
이렇게 2시간쯤 시달린 끝에 드디어 비행기를 탈 시간이 왔다 누군가가 출발시간이라고 큰소리쳐 우리들은 비행이 쪽으로 걸어나섰다. 그러나 「데모」대원들은 길을 막고 우리들을 꼼짝 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유럽」외교관의 한사람이 내 5세된 딸을 안아 비행기에 태워준 것을 기억한다.
뒤따른 처와 아들도 전송나온 각국의 외교관들이 「스크럼」을 짜서 호송, 비행이에 태워주었다.
나는 그들에게 얼마나 감사했는지 지금도 그때의 감격을 잊을수 없다. 비행기는 우리가 타자 곧 이륙했다. 이것으로 나는 모든 수난을 면했다고 안심했으나 오산인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비행기가 광주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서도 똑같은 「데모」대의 난동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도 그들은 우리 가족에게 점심을 주지 않았다.
우리들은 배고프고 지친채로였다. 다음날 광주에서 열차로 국경의 도시 심천을 거쳐 영영내로 들어섰을 때야 비로소 「데모」대의 난동과 소음을 멀리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신분기자와 「카메라맨」들이 우리를 환영해주었다.
위험속에서 우리가족을 끝내 지켜준 신의 자비에 깊이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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