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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칼럼] 만성골수성백혈병 치료의 역사 ① ‘마법의 탄환’ 백혈병 치료의 길을 열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동아대학교병원 혈액종양내과
김성현 교수

현대의학에서 가장 획기적인 치료의 신기원을 이룩한 질환을 고르라고 하면 단연 만성골수성백혈병일 것이다. 만성골수성백혈병은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이식이 아니고서는 장기 생존을 할 수 없는 질환으로 여겨졌으나, 이매티닙(글리벡)이라는 신약이 나오면서 이식을 하는 환자들보다 더 오랫동안 부작용 없이 정상 생활을 할 수 있게 됐다. 이매티닙이 개발되기 전에는 만성골수성백혈병으로 진단 받게 되면 이식 외에는 완치를 위한 뚜렷한 방법이 없었으며, 질병 자체의 자연 경과를 바꿀만한 약제도 없어 환자와 그 가족들은 물론 의료진들까지도 안타깝게 했던 심각한 질환이었다. 하지만 현재는 일종의 만성질환으로까지 여겨질 정도로 만성골수성백혈병은 치료에 있어 놀랄만한 발전을 이뤘다. 이는 의료현장에서도 마찬가지인데 필자가 수련을 받을 때만 하더라도 환자와 보호자에게 일정 기간은 증상이 없이 유지가 되는 병이지만 3~5년 후에는 결국 병이 진행하여 사망하는 질환이라고 설명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매티닙이라는 암에 대한 최초의 표적치료제가 개발됨으로 인해 이제는 투약만 잘 하고 질병의 경과를 잘 모니터 한다면 장기적인 생존을 기대할 수 있는 병으로 설명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이매티닙은 만성골수성백혈병뿐만 아니라 모든 항암치료에 있어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했음은 물론 다양한 암에 대한 표적치료제의 개발을 선도했다. 이에 만성골수성백혈병의 치료 발전사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80년대 이전의 만성골수성백혈병의 치료
현대의학에서 만성골수성백혈병에 대한 첫 기술은 1845년경에 시작됐는데, 1800년 후반까지의 주된 치료는 토마스 파울러 라는 사람이 개발한 파울러 용액이라는 것이었으며 이는 비소 성분을 함유하고 있었다. 1900년대 초와 1960년대 초 까지는 비장에 대한 방사선요법이 주된 치료법이었는데 이는 만성골수성백혈병 환자에서 백혈구 수치의 증가와 함께 비장이 커지게 됨으로 증상을 완화하는 수준이었다. 1950년대에는 부설판이라는 항암제가 도입되었으며, 이로 인해 백혈구의 증가를 일정 기간 동안 억제할 수 있게 됐다. 또한 1968년 부설판에 대한 방사선요법과의 비교 연구 결과, 부설판의 치료 효과가 더 좋다는 것이 발표되면서 더욱 널리 사용됐다. 그러나, 부설판은 심각한 독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오랜 기간 골수에서 혈구세포의 형성을 방해하고, 폐독성, 부신피질기능저하 등을 나타냈다. (아이러니하게도 부설판은 현재까지도 이식치료에 있어 중요한 약제이다. 이는 부설판이 혈액암 세포를 광범위하게 죽이는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이후 1972년도에 하이드록시우레아 라는 항암제가 도입되었으며 만성골수성백혈병의 치료에 널리 사용되었는데, 이는 부설판에 비해 용량 조절이 수월하여 백혈구 수치 조절에 편리하고, 부설판의 중요 부작용 중의 하나인 오랜 기간 골수에서 혈구세포의 형성을 막는 부작용이 적었기 때문이다. 1993년에는 실제로 부설판보다는 하이드록시우레아가 더 좋다는 연구결과도 있었으나 이러한 치료법들이 만성골수성백혈병의 자연 경과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했다.

80년대, 조혈모세포이식 치료의 본격적인 시작
1970년대 혈액암의 완치를 목적으로 조혈모세포이식이 도입된 이후, 만성골수성백혈병 환자들에게 이식을 시행하여 병이 없는 기간이 약 50%에 이를 수 있음이 보고되어 전세계적으로 널리 시행되게 됐다. 만성골수성백혈병 환자들에 대한 동종 조혈모세포이식의 결과는 1978년 미국의 시애틀 그룹이 처음 보고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1983년에 조혈모세포이식이 시작된 이래 1988년 만성골수성백혈병 환자 6명에 대한 이식의 결과가 보고됐다. 그러나, 이식 치료는 사망의 위험을 가지고 있는 치료법이며, 이식을 위한 일치하는 유전자를 가진 공여자가 필수적임은 물론 이식 후 면역반응으로 인해 환자의 삶의 질이 떨어질 수 있다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이식 후 환자가 완전히 안정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며, 가족들의 확고한 정신적, 경제적 지지가 필요하다.

90년대, 인터페론의 시대
인터페론은 1980년대부터 연구가 시작됐으며, 1990년 초에 만성골수성백혈병 환자에게 효과가 있음이 증명됐다. 처음으로 만성골수성백혈병의 병인이 되는 필라델피아 염색체를 줄일 수 있는 것으로 보고가 된 것이다. 인터페론은 세포를 죽이는 항암제와는 달리 일종의 단백질로 만성골수성백혈병에 대한 작용기전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면역반응을 유도하여 세포 내 필라델피아 염색체의 수를 최대 38% 정도까지 줄일 수 있는 있는 것으로 보고되어 90년대에 널리 사용됐다. 인터페론의 용량을 많이 사용할수록 반응도 좋았으며, 필라델피아 염색체를 완전히 없앨 수 있는 반응도 나타났는데 여기에는 수 개월에서 수 년이 걸리기도 했다. 또한 인터페론은 하이드록시우레아, 부설판 등과의 비교 연구들을 통해 효과와 생존율의 향상을 증명했다. 하지만 인터페론을 주사 받은 환자들은 감기 몸살과 비슷한 증상을 경험하게 되고, 발열, 오한, 근육통 등으로 인하여 환자들이 불편을 겪었다. 그리고 인터페론에 시타라빈이라는 항암 약제를 병합하여 치료할 경우 더 많은 치료 효과는 있었으나 더 많은 독성을 경험하는 단점이 있었다.

2000년대, 암 표적치료제의 시대
2000년대에 들어 만성골수성백혈병의 치료는 단순히 백혈구의 증가를 조절하여 증상을 완화하던 것에서 병인을 연구하고 밝혀 이를 치료에 응용하는 시대가 열리게 됐다. 만성골수성백혈병의 병인에 대한 연구는 꾸준히 이뤄졌었는데, 1960년 미국의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연구소에서 피터 노웰과 데이비드 헝거포드가 만성골수성백혈병 환자들에서는 공통적으로 특정 염색체가 짧아지는 것을 발견했다. 당시에는 이것이 병인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만성골수성백혈병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으로 받아들였으나, 1973년 자넷 롤리가 22번 염색체의 특정 부위가 떨어져나가고 9번 염색체의 일부가 22번 염색체에 붙는데, 이는 22번 염색체가 짧아져서 생긴 것이라고 규명하였고 이 22번 염색체를 필라델피아 염색체라 칭했다. (염색체라는 것은 세포의 핵에 존재하는데 이는 수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 DNA가 뭉쳐서 생긴 하나의 유전정보 집합체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거치면서 이러한 유전정보의 이상이 암을 유발할 수 있다고 밝혀졌으며, 필라델피아 염색체에 존재하는 새롭게 만들어진 BCR-ABL 유전자가 백혈병을 유발하는 유전자라는 것을 1990년에 규명하게 됐다. 또한 이런 발견을 기초로 많은 분자생물학적 연구가 진행됐으며, BCR-ABL 유전자로부터 만들어진 특정 단백질이 끊임없는 백혈구의 세포 증식을 유발함이 밝혀졌다. 이를 바탕으로 이 물질을 억제하여 만성골수성백혈병을 치료하는 연구도 시작됐다.

BCR-ABL 유전자로부터 만들어진 물질이 백혈구의 증식을 유도하려면 체내의 ATP라는 것이 해당 물질에 붙어야 한다는 것을 기초로 1993년에는 이매티닙이라는 성분을 치료제로 개발하게 됐다. 이매티닙의 작용 기전은 ATP가 BCR-ABL 유전자로부터 만들어진 유전물질이 활성화되지 못하게 ATP가 붙는 것을 경쟁적으로 억제하는 것이다. 실험을 통해 이 물질이 만성골수성백혈병의 백혈구세포증식에 상당한 효과가 있음이 증명됐으며, 1995년에는 이 결과가 처음으로 미국혈액학회에서 보고됐다. (미국혈액학회는 전세계 혈액질환을 연구하고 치료하는 의료인 수 만 명이 모이는 전세계에서 가장 큰 학회 중의 하나이다.) 이를 바탕으로 인터페론에 효과가 없었던 환자들을 대상으로 임상연구가 시작됐으며, 1999년 미국혈액학회에서는 기존의 치료에 반응이 없던 환자들에게서 놀랄만한 효과가 나타났음이 보고됐다. 2000년 6월부터는 처음 진단받은 만성골수성백혈병 환자들을 대상으로 인터페론 치료와 시타라빈 치료를 병합 치료하는 군과 이매티닙으로 치료하는 군을 1대 1로 무작위 배정한 임상연구가 시작됐다. 이는 이매티닙이 인터페론에 비해 얼마나 월등한 효과가 있는지를 보기 위함이었으며 약 1000명의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임상연구였다. 그 결과 이매티닙은 기존 치료 대비 월등한 효과를 보였음은 물론 경미한 부작용 만이 나타났다. 또한 5년째를 기준으로 하여 89%의 환자들이 생존하였으며, 93%의 환자들에서 병의 진행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매티닙은 만성골수성백혈병의 병인이 되는 유전자를 목표로 하여 개발된 최초의 표적치료제이며, 선택적으로 암 유전자에만 작용하여 치료의 신기원을 이룩한 그 별명처럼 ‘마법의 탄환’같은 약제이다. 이는 만성골수성백혈병 치료의 역사를 이매티닙 등장 전과 이매티닙 등장 후로 이분화할 수 있을 정도로 난치성 질환에 대한 현대의학의 큰 성과였다. 하지만 만성골수성백혈병 환자 중에도 일부는 이매티닙에 대한 반응이 초기에 없거나 치료 중 유전자변이로 인해 내성을 보이는 환자가 나타났으며, 이러한 환자들을 위한 연구가 계속되어, 내성을 극복할 수 있음은 물론 치료 효과는 더 높은 차세대 약제들이 개발되어 2000년대 중 후반부터 환자들에게 처방되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닐로티닙, 다사티닙, 라도티닙이 현재 국내에서 처방 가능하며, 이중 라도티닙은 국내에서 개발된 약제로 2012년 미국혈액학회에서 그 효과가 발표된 바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만성골수성백혈병의 치료역사를 통해 향후 암 치료 및 연구의 방향과 성과를 가늠할 수 있었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완치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많은 노력이 계속해서 이어질 것으로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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