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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근영의 그림 속 얼굴

그리고 쓴다는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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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권근영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제목도 없는 이 그림이 무엇을 그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색채도 무시됐다. 오로지 꿈틀거리는 움직임만 있다. 형상이 아닌 감각이며, 화가가 몸으로 밀고 간 흔적이다. 생존 최고의 화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게르하르트 리히터(81)의 초기작 ‘무제(녹색)-317’(1971)이다.

 태초에 선이 있었다. 선은 인간이 처음 무언가의 흔적을 남긴 것이다. 이 선 긋기의 전통은 갑골에, 목간에 칼로 새기던 시대를 거쳐 문자의 시대, 붓의 시대로 이어졌다. 이 선이 ‘그린 것’인지 ‘쓴 것’인지, 그런 구분은 중요치 않았다. 글자와 그림은 한몸, 서화동원(書畵同源)이었으니까. 이 전통을 서구에선 전후 추상미술이 넘겨받았다. 동아시아, 특히 일본의 서예에 깊은 인상을 받은 화가들이 형상을 모방하는 서구 회화의 전통을 버리고 추상에 천착했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 즉 쓰지 않고 (자판을) 두드리는 오늘날엔 당나라 장언원(張彦遠, 815∼875)이 설파했던 서화동원론이란 마치 ‘잃어버린 낙원’을 말하는 듯 아득하다.

게르하르트 리히터, 무제(녹색)-317, 1971. 캔버스에 유채, 200×130㎝. [사진 리튼아트재단]

 국내 유일의 서예 전문 공립 전시관인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이 개관 25년 만에 처음으로 서구 추상화를 걸었다. 리히터를 비롯해 프란츠 클라인(1910~62), 사이 톰블리(1928∼2011), 윌렘 드 쿠닝(1904~97) 등 진용이 화려하다. 이응노(1904∼1989), 서세옥(84), 이우환(77) 등 한국 현대미술가들의 작품도 함께 걸렸다. ‘그리기와 쓰기의 접점에서’라는 야심 찬 제목으로 다음 달 5일까지 열리는 전시다.

 전시가 이뤄진 데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소재 리튼아트재단(Written Art Foundation)의 힘이 컸다. 제약회사인 베링거인겔하임의 크리스티안 베링거(48) 회장이 주도해 2011년 만든 이 재단은 손글씨의 가치를 전파해 문화적 가교를 놓자는 비전을 갖고 있다. 손글씨 훈련을 통해 정신을 고양하는 서예에 주목해 동아시아뿐 아니라 아랍과 서구의 서예·문자예술 작품을 수집했다. 재단의 앙드레 크넵(61) 고문은 “재단의 철학은 한마디로 ‘예술과 평화’다. 오늘날 문화 차이에 따른 갈등은 아슬아슬할 정도인데, 그걸 평화 국면으로 전환할 수 있는 것이 예술이며 인문학”이라고 말했다.

 재단은 전시 장소로 서울 서예박물관을 택하고 운송비를 부담하며 68점의 소장품을 보내왔다. 그러나 전시장은 초라하다. 애초부터 강의실로 지어진 건물인지라, 층고도 낮고 항온항습 시설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그게 공립 서예 전문 전시관의 현주소며, 오늘날 서예에 대한 대접이다.

권근영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