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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댄스 필름 페스티벌 참관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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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면

지난 27일 미국 북서부 유타주의 파크 시티에서 독립영화 감독.제작자를 위한 잔치인 선댄스 필름 페스티벌이 열흘 간의 막을 내렸다. 해마다 세계 영화축제의 개시를 알리는 행사인지라 영화제 내내 파크시티의 극장 안은 뜨거웠다.

이곳 관객은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박수치고 환호한다. 영화가 끝나면 더 큰 박수가 폭발한다. 선댄스의 전통이다. 영화 한 편 만들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견해지만 올 최고의 작품은 1분도 안되는 영화제 인트로(Intro) 였다. 흰곰 한 마리가 빙판 위를 힘겹게 기고 있다. 앞다리는 이미 부러졌다. 얼굴과 상체를 빙판에 늘어뜨리고 뒷다리로만 온몸을 밀고 간다. 삭풍이 몰아치는 빙판 위에 쓰러진다. 어떻게든 전진해 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모든 영화 앞에 붙어 있는 이 화면이 나올 때마다 관객은 웃음을 터뜨리면서도, 영화에 대한 열정 하나로 공룡 같은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과 맞서는 독립영화인의 냉혹한 현실을 떠올렸다.

올해는 '저수지의 개들''블레어 위치''메멘토''헤드윅' 같은 파격적인 형식.장르 실험이 돋보이는 영화가 드물었다.

그런 영화가 의도적으로 배제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서 2003년의 선댄스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후폭풍에서 벗어난 첫 해로 기억될 것 같다.

10여년 전 선댄스 숲속에서 타란티노란 천재적인 흰곰이 등장해 전세계 독립영화계를 뒤흔들었다. 수많은 추종자가 그의 뒤에서 헤매고 있을 때 그 자신은 메이저 시스템 속으로 들어갔다. 권불십년(權不十年)! 미국의 '타란티노식'이나 유럽의 '도그마' 같은 실험 자체가 오히려 진부해진 지금 선댄스는 영화의 기본인 '이야기로 돌아가자'를 선택한 것이다.

기차를 좋아하는 난쟁이, 아들을 잃은 여성 화가, 음료수 장사를 하는 쿠바 난민이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외로움을 나누는 일상을 쫓아간 영화 '역무원'이 관객상.각본상을 탄 것이다. 또 열세살짜리 소녀의 변신 욕구가 자신과 주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그린 캐서린 하드윅 감독의 '13살'이 감독상을 탔다.

묘한 건 세계 영화계의 취향을 리드하는 눈 높은 선댄스의 관객이 이런 소박한 영화에 눈물로 감동하고 기립박수를 쳤다는 사실이다. 반면 대박을 터뜨릴 기발하고 유별난 영화를 사냥하러 온 영화업자들은 돈 될 만한 영화가 없다고 툴툴거리며 돌아갔다. 특기할 변화는 전혀 다른 부분에서 발생했다. 바로 디지털! 올해 상영작 중 25% 이상이 디지털 카메라로 찍었다.

중국영화 두 편, 일본영화 두 편이 참여한 데 비해 한국영화가 한편도 없었던 게 아쉬웠다. 그러나 선댄스에서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오는 도로변에 있던 한국 전자업체의 광고판이 위안이 됐다. 카피는 '디지털적으로 인사드립니다-Digitally Yours!'. 선댄스의 흰곰들아 기다려라, 한국영화가 곧 올 것이다. '디지털적으로-Korean Films Digitally Coming Soon!'

조철현(타이거픽쳐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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