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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희망의 계단(5)|주권재민|두 여류작가가 본 유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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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공화당>
푸대접을 받고있다는 호남의 중심도시 광주의 오후는 일기마저 대접을 못 받았는지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는 가랑비마저 내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유세강연시간인 2시가 가까워오자 이 조용한 교육도시 광주의 거리는 잔칫집같이 술렁대기 시작했고, 찌푸렸던 하늘도 체면을 차렸는지 따가운 4월의 햇살이 내리기 시작했다.
유세장소인 조선대학으로 가는 진흙 투성이 골목길은 말쑥한 신사 차림부터 옥양목 두루마기의 낡은 중절모의 할아버지들까지 걸음을 재촉했다. 그들의 표정은 선거를 1주일 앞두고 막바지 열전을 벌인 주인들보다는 너무나 평화스럽고 태평해 보였다. 그들의 마음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장날 아낙네의 고무신을 사다주러 나온 거 같은 순박한 얼굴-.
그러나 그들에게도 할말이 있고 듣고싶은 이야기가 있을 게다. 참다운 민주주의의 기원은 소외당한 거 같은 이 순박한 얼굴들에 있지 않을까? 유세장소인 조선대학 넓은 운동장은 정각 2시전에 벌써부터 모여든 인파로 자리를 메웠다. 가마니를 깔고 신문지로 햇볕을 막는 많은 군상들은 두 번째로 등단한 박정희 후보의 모습이 나타나자 일제히 박수로 첫 인사를 했다. 짙은 쥐색 「싱글」에 화려하지 않은 「넥타이」가 과묵한 표정에 조화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입가에는 엷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박 후보의 연설은 침착하게 열도의 강약이 없이 조용히 이끌어나갔다. 우선 잘 살기 위해서의 첫째 문제는 경제건설에 있다고 말했다. 그러려면 근대화한 공업국이라야 되고 동시에 농촌부흥의 방법은 농업 그 자체에만도 있는 게 아니고 어디까지나 공업과 병행해야 부강한 나라가 된다는 것을 역설했다. 그러나 좀더 직접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감각적인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나 생각했다.
그리고 선심도 좋고 인기전술도 좋지만 일에 앞서는 설계가 있어야 되고 청사진이 있어야한다고 야당에 일침을 놓기도 했다.
그 많은 눈과 귀는 무언지 바라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곧 잘살 수 있는 길의 열망인지 모른다. 우리는 그 눈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랜 정치시련을 겪어온 그들은 참고 견디고 또 한번 기대해본다. 한술에 배부르지는 않는다. 불모지에서 우람된 수림을 만들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들은 오늘의 백만 가지 말 중에서 한 마디쯤은 가슴에 지니고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내일도 오늘같이 호미를 들고 땅을 팔 것이다. 잘 살수 있는 길을 위해서…. 그는 호남이 푸대접을 받고 있다는 말은 있을 수 없는 말이고 일에는 순서가 있는 것이라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호남 넓은 평야 구석구석에 공장의 검은 연기가 오를 때, 비로소 곡창지 호남의 들판은 새로운 공업권의 대열에 설 수 있을 게고 그들의 섭섭함이 가실 수 있는 날도 멀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돌아갔는지 모른다.
그들은 정권의 시샘에는 구토증을 느끼고 냉정히 외면을 한지 오랜 지 모른다. 그들은 다시는 광풍에 휘말리는 가랑잎이 되기를 원치 않을게다.
강연이 끝날 무렵, 내 앞을 지나가는 백발의, 거의 허리가 맞닿은 여자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뒤쫓아 팔을 부축하며 『어유, 연세가 몇이나 되시는데 이런 어려운 나들이를 하셨어요.』 『꼭 내년이면 야든이라우.』 눈꼽이 끼고 오므라진 입에서는 말이 새어 나온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나오셨어요?』 『대통령 얼굴 좀 보러 왔당께.』
그들은 이제 보고 느끼고 판단할 줄 안다. 그때 한편 구석에서 왁자지껄하고 사람이 몰렸다. 거기에는 혈서를 써서 순간적인 영웅이 된 한 청년이 서 있었다. 진정을 호소할 길은 얼마든지 있다. 이제 이 땅에 저런 즉흥적인 「쇼」를 벌여 야만적인 애국자노릇을 하는 청년이 없어져야 진정한 세련되고 멋진 정치풍토가 이루어지는 게 아닌가 생각을 하면서 돌아섰다.

<신민당>
삼학도를 거쳐드는 바닷바람은 물위로 치닫고, 사람들은 유세장인 북교 국민학교 길을 메우듯이 올라간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은 즐거운 것 같지도 않았고 기대에 부풀어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자신에 차있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비굴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표정이요 분위기라고 해야 옳을는지.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선거 때나 되어야 한강을 건너, 그것도 열병 치르듯이 제멋대로 뜨거워져 가지고 휘돌다 가는 것은 아닐는지.
유세장을 메운 사람들의 얼굴은 얼른 표정을 집어내기 어려웠다. 그것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성장인지도 모른다. 제각기 의중을 의중대로 지녀 흔들림 없는 하나의 권리로서-. 그런가하면 한편에서는 잔뜩 벼르는 듯이 내로라는 태도로 유세장에 자리잡은 사람들도 보였고 무슨 축일을 만난 듯 의관을 갖추었거나 나들이 차림을 하고 나선 부인네들도 눈에 띈다.
이런 때를 놓치면, 그 높고도 유명하고 당당한 그 사람들 앞에, 언제 꿈에나마 행세 한 번 해볼 거냐. 그 사람들의 애걸복걸을 그럴듯이 굽어보아 주자는 소박한 권리행사인가 하면, 그저 사람이 사람을 따르고 또 인파가 인파를 부르는 대로 휩쓸려 온 듯한 일군도 보였다.
오후 세시에서 삼십 분이 지나도 윤 후보 일행은 도착하지 않는다. 나주 유세에서 늦어지는 모양. 다부지게 생긴 신민당 당원 한사람의 줄기찬 구호외침 뒤에 앉은 채로의 국기게양이다.
일행이 도착한 것은 네시이십분 경. 청중들 한가운데를 가르고 들어서는 윤 후보의 얼굴은 깜짝 놀랄 만큼 검게 타 있다. 연사가 바뀌고, 그 내용은 보다 강한 색채의, 현정부에 대한 비난으로 메워진다. 비난, 힐난. 이따금 박수와 웃음이 터진다. 옳거니, 그도 그럴 게다, 있는 일이겠지. 잠깐 술렁대고 흔들린다. 그러한 얘기들을 줄곧 듣지 않더라도 우리는 참으로 오랫동안 가엾게만, 살아왔던 족속이고 아직도 답게 살기에는 시간이 필요한 백성인지 모른다.
그러다가…, 남들이 배에 실어다 준 민주주의는 국민을 실험용으로 삼게 했다. 민주주의의 제1조인 인간존중은, 투표라는 익명행위에서 피차가 무책임하게 얼버무리다시피 하고 있는 것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실정이 아닐는지.
그들의 열띤 분위기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본다. 권력의지, 권력의지. 권력의지의 내뻗음이라면 어떨까? 참으로 덕성을 주어 생명 그 자체의 힘의 소용돌이라고 여기고도 싶지만 구경스럽다는 느낌도 털어 버릴 수가 없다.
억양이 일정한 윤 후보의 유세는 차근차근했다.
오른편으로 유달산을 어깨에 얹고 목포시를 내려다보는 유세장에 땅거미가 스미고 신문지 한 장으로 땅바닥에 앉아 배긴 몇 시간이 주리 틀듯해 오건만 청중들은 다음 연사를 기다려 움직일 줄을 모른다.
감격만 가지고 잘사는 것도 아니겠지만 감격도 시들고 약속도 좀처럼 믿을 수 없게된 처지 참으로 이 사람이다. 싶은 인물은 어디에, 권력의 좌에서 권력의 유행아가 되지 않는 인물은 어디에, 국민과 함께 숨쉬며 그 사랑하는 마음에 이상 없는 싱싱한 지도자는 어디에 있을까.
제민, 누가 제민할 수 있느냐. 제각기 손을 펴본다. 가난한 나라, 후진의 나라, 많이도 참고 기다리기만 하던 나라에 태어난 그런 손금을 타고난 손이지만 그 손에 의지하는 길밖에는 없는 것이다. 내게 주어진 권리를 내 소신껏 행사하며 속임수 없이 일하며 슬기를 닦아 갈 수만 있다면…, 싱싱한 지도자만 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싱싱한 앞날도 약속되어 줄 것 같다.
4년만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나날의 즐거운 주권을 찾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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