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사람도 다시 보자~ 당뇨병엔 예외가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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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 박서형(37·경기도 하남시)씨는 얼마 전부터 도시락을 싸온다. 아침에 빵·떡·고구마를 먹으며 끼니를 해결하던 습관도 고쳤다. 남들은 말랐는데 무슨 다이어트냐고 핀잔했지만 사실은 혈당 관리 때문이다. 그는 최근 건강검진 결과 당뇨병으로 진단받았다. 담당 의사는 “더 방치했다면 당뇨 합병증이 나타날 정도로 상태가 심각하다”고 말했다. 박씨는 “당뇨병은 기름진 음식을 좋아하는 뚱뚱한 사람이나 걸리는 병 아니냐”며 “다른 사람보다 마른 내가 당뇨병으로 고생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말했다.

탄수화물 위주 식습관이 문제

서울성모병원 차봉연 교수가 당뇨병환자에게 혈당 조절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수정 기자]▷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뚱뚱하면 일단 당뇨병을 의심하라’라는 말이 있다. 비만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서다. 비만은 혈관 속 인슐린 요구량을 늘린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결국 췌장의 인슐린 생산 기능을 떨어져 당뇨병을 유발한다.

그렇다면 정상체중은 당뇨병의 안전지대일까. 한국인은 정상체중이거나 오히려 마른 상태인데도 당뇨병에 걸린다. 서울성모병원 내분비내과 차봉연 교수(대한당뇨병학회 이사장)은 “서양인은 비만형 당뇨가 70~80%지만 한국인은 마르거나 정상 체형인 당뇨병 환자가 60% 이상”이라고 말했다.

이런 사람은 췌장에서 인슐린을 생성·분비하는 씨앗인 베타세포에 문제가 있다. 인슐린을 적게 만들거나 부실한 인슐린을 만들어 작은 위험요소에도 당뇨병으로 악화된다. 서울대병원 내분비내과 조영민 교수는 “한국인을 포함한 동양인은 서양인보다 췌장 베타세포가 적어 인슐린 분비 기능이 떨어진다”며 “이것이 마른 상태인데도 당뇨병에 걸릴 수 있는 이유”라고 말했다.

밥·빵·떡·미숫가루·면 등 탄수화물 위주의 식습관도 문제다. 탄수화물은 쉽게 포도당으로 바뀐다. 몸속에 포도당이 많아지면서 인슐린이 과다 분비된다. 포도당은 소화가 빨리 된다. 혈당이 떨어지면서 진땀이 나고 집중력이 떨어진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거나 심한 허기를 느끼기도 한다. 이후 뇌는 사용해야 할 포도당이 부족하다고 인식해 포도당을 보충하도록 지시한다. 다시 당분이 많은 음식을 먹게 된다.

탄수화물 과다 섭취→ 포도당 과다 생성→ 인슐린 과다 분비→ 당뇨병 유발이라 악순환을 반복한다. 차봉연 교수는 “서양인의 탄수화물 섭취 비중은 30% 정도지만 한국인은 두 배 이상”이라며 “혈당지수가 낮은 생선이나 나물 같은 섬유질 음식을 먹으면서 탄수화물 비중을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인체 고유 혈당조절 능력 키워야

당뇨병 치료 핵심은 혈당 조절이다. 혈당이 높은 혈액은 몸 곳곳을 돌며 혈관을 망가뜨린다. 눈·심장·발에 심각한 흔적을 남기기도 한다. 혈당을 낮추려면 식사·운동 요법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 혈당을 높이는 음식 섭취를 피하면서 꾸준히 운동을 한다. 운동은 인슐린 감수성을 높여 혈당 조절을 돕는다.

약물 치료도 있다. 당뇨병약은 인슐린이 생성·분비하도록 자극한다. 부족한 인슐린을 보충하기 위해서다. 문제는 부작용이다. 기존 당뇨병약은 췌장 베타세포를 강제로 자극해 인슐린 분비를 촉진한다. 장기적으로 췌장 베타세포의 수가 줄어 인슐린이 잘 분비되지 않게 된다. 치료를 위해 먹은 약이 오히려 혈당관리를 어렵게 하는 셈이다.

체내 혈당수치와 상관없이 인슐린이 생성·분비되는 것도 한계다. 체내 혈당이 정상보다 낮은데도 인슐린이 계속 나온다. 결국 혈당이 심하게 떨어져 저혈당증 쇼크로 생명을 위협받을 수 있다. 체중이 쉽게 증가한다.

최근 이런 점을 보완하면서 한국인 당뇨병 특성에 맞춰 개발한 신약(제미글로·LG생명과학)이 나왔다. 인슐린을 분비하는 호르몬인 인크레틴을 활성화하는 DPP4 억제제 계열이다. 췌장 베타세포의 기능에 주목해 인체 고유 혈당조절 능력을 높여 인슐린 분비 기능을 개선한다. 저혈당증·체중증가 같은 부작용도 없다.

조영민 교수는 “체내 혈당수치에 따라 혈당이 높을 때만 선택적으로 인슐린을 분비해 당뇨병을 치료한다”며 “동물실험에서는 베타세포의 양이 줄어드는 것을 차단해 혈당이 떨어지는 것을 막았다”고 말했다.

체형·인종 따라 치료법 달라

치료 효과도 좋다. 서울대병원 내과 조영민 교수팀은 국제논문에 발표된 55개의 임상연구에 참여한 당뇨병 환자 1만8328명을 재분석했다. 55개 임상연구 중 54개의 임상연구를 동양인(13개)과 서양인 대상 연구(41개)로 나눴다. 이후 각각 DPP4 억제제를 사용했을 때 당화혈색소가 얼마나 떨어지는지 분석했다. 당화혈색소는 당뇨병 치료에서 가장 중요한 지표다.

연구 결과 서양인은 DPP4 억제제를 투여받은 비교군이 투여받지 않은 대조군에 비해 최근 3개월간 당화혈색소가 평균 0.65% 떨어졌다. 반면 동양인은 평균 0.92% 감소했다. 서양인과 비교해 동양인의 당화혈색소 지표를 0.27% 더 낮췄다. 동양인에게 약효가 좋다는 의미다.

당뇨병 환자의 혈당 조절 목표치인 당화혈색소 수치를 7% 미만으로 조절하는 비율도 동양인이 서양인에 비해 높게 나타났다. 동양인에게서는 DPP4 억제제를 투여받은 비교군이 투여받지 않은 대조군에 비해 당화혈색소 수치 조절에 성공한 비율이 3.4배 높은 반면 서양인에게서는 1.9배에 그쳤다.

조 교수는 “마른 당뇨병 환자는 비만도가 낮아 췌장 베타세포의 기능을 개선하는 약이 더 효과적”이라며 “인종·체형에 따른 맞춤 당뇨병 치료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기대했다.

글=권선미 기자
사진=김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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