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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중엽∼말엽 인물중심>(49) 오경석 - 유홍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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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역관으로 북경 왕래>
오경석은 1831년 1월 21일에 서울 중부 시궁골(지금의 장교동)에서 지중추부사 오경현의 장자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중인으로서 대대로 역관을 지내왔으며 그도 역시 중국어 통역관이었다. 그의 아들은 3·1운동 때에 33인중의 한사람인 오세창이었다.
그는 특히 금석학의 대가로서 많은 중국역대 금석문을 수집했을 뿐만 아니라 「삼한 금석록」이라는 저서까지 지었다.
오경석은 당시에 유능한 중국어 통역관이었다. 따라서 그는 전후 열 차례에 걸쳐 북경에 왕래하면서 견문을 넓히고 청의 지명인사들과도 널리 사귈 수 있었다.
이러한 기회를 통하여 그는 일찍부터 국제정세에 대한 비교적 정확한 인식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것을 다시 그와 뜻을 같이 하는 유대치·박규수 등에게 전달했다.

<문호개방을 주장>
유대치와 박규수는 당시에 가장 선각적인 인사들이었다. 그들은 오경석을 통하여 얻을 수 있었던 외국에 대한 지식과 서적을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서재필 등의 청년 귀족들에게 가르쳐 줌으로써 조국근대화의 실현을 촉구했다.
그러므로 1884년 12월에 있었던 갑신정변은 실로 오경석의 영향이 컸다고 하겠다.
당시의 조선정계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국론은 개화를 반대하는 방향으로 굳어져있었다. 그는 대원군과 상당히 가까운 사이였지만, 국제정세로 보아 하루라도 빨리 문호를 개방하고 선진제국의 우수한 문물을 받아들여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중인이라는 신분적인 제한 때문에 직접 선두에 서서 조국근대화의 과업을 지도할 수는 없었다. 다만 이유원(영의정) 박규수(좌의정) 등의 뜻 있는 당로자 들을 움직여 그 목적을 달성하려고 노력했다.

<교활한 일과의 교섭>
그의 이와 같은 노력은 우리나라가 외국에 대하여 최초로 문호를 개방한 강화도 조약 때에 집약적으로 나타나있다.
일본은 1876년(병자)에 전년에 있었던 운양호사건의 책임을 묻고, 이것을 기화로 개항을 요구할 목적으로 전권변리대신 흑전청륭과 부 대신 정상형을 우리나라에 파견했다. 그들은 7척의 군함을 인천 앞 바다에 정박시키고 공포를 발사하여 우리 정부를 위협했다. 정부는 하는 수 없이 외교절차에 밝은 한학 당상관 오경석과 동래 왜학훈도 현석운을 남양만에 정박하고 있는 일본 군함에 보내어 회담장소와 절차를 협의하게 했다. 그리하여 1876년 1월 17일 강화부 연무당에서 접견대관 신포과 흑전 일본전권대신 사이에 최초의 정식 한·일 회담이 열렸다.
그러나 외교적인 지식과 경험이 부족한 우리측 대표들은 미리 준비된 일본측 계획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자기 나라(일)의 문호를 최초로 개방할 때 쓰던 방법을 그대로 우리나라에 적용했다. 이것은 불평등조약의 전형적인 예이다. 오경석은 정식수행원은 아니었지만, 일본측과 막후교섭을 하여 외교절차에 따라 회담을 진행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리하여 교섭을 시작한지 20여 일 만인 2월 27일에 강화도 조약은 체결되었다.

<태극을 국기로 지적>
그때 일화 중에 태극기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일본측이 우리나라 국기의 제시를 요구하자 오경석은 임기응변으로 연무당 문에 그려져 있는 태극을 가리키면서 『저것이 우리의 국기』라고 했다한다. 이것이 태극기를 만들게된 기연이 되었다고도 한다.
이와같이 오경석은 우리나라의 문호를 개방하는 데 배후에서 큰 역할을 한 한말의 숨은 공로가 있는 선각자였다. 물론 그가 바라던 개국이 강화도 조약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국제정세에 따라 당면한 외교문제를 해결하는데 그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국론을 조국근대화로 돌리기 위하여 일신상의 이해를 떠나서 행동했다. 그 때문에 말년에는 개국을 반대하는 대원군의 미움을 받게되어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한다.
그러나 그의 공로는 인정을 받아 1877년에는 숭록대부(종일품)가 되었다.
그후 그는 오랫동안 와병 후 1878년 8월 22일 서거했다. <필자=문박·대구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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