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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렇게 사니” 말 대신 선물하고 싶은 책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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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호 28면

독일 튀링겐에 있는 자갈길.

인생이 길이라면, 길에는 ‘간 길’이 있고 ‘가지 않은 길’이 있다.

힐링 시대 마음의 고전 ④ M 스콧 펙의 『인적이 드문 길』

돌이켜 생각해보면 학교에서 배운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1876~1963)의 시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은 이렇게 끝난다. “아주 먼 훗날 어디선가 / 난 한숨 지으며 이렇게 이야기할 겁니다 / 두 갈래로 숲 속 길이 나뉘었다고, 나는 인적이 드문 길로 갔다고(I took the one less traveled by), / 그래서 모든 게 달라졌다고.”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해 어깨를 부딪치며 걷는 길이 있는가 하면 사람들이 덜 가는 한가한 길도 있다. 두 길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어떤 길이 더 힘들까. 어떤 길이 하늘로 올라가는 쌩쌩한 동아줄 같은 길인가.

『The Road Less Traveled』의 국문판(왼쪽·『아직도 가야 할 길』, 영문판 표지.

“인생은 힘들다(Life is difficult). 인생이 힘들다는 것을 인정하라. 그리하면 오히려 인생이 더 이상 힘들지 않게 되는 길이 열린다. 그러나 그 길은 인적이 드문 길이다. 그 길로 가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행복하게 되라.” M 스콧 펙(1936~2005)이 『인적이 드문 길: 사랑, 전통 가치, 영적 성장의 새로운 심리학(The Road Less Traveled: A New Psychology of Love, Traditional Values, and Spiritual Growth)』(1978·이하 『길』)에서 던지는 메시지다.

절제 있어야 영적·정신적으로 발전
단순하고도 당연한 메시지인지 모르지만 미국 독서가들은 『길』에 열광적으로 반응했다. 펙은 하버드대 출신의 정신의학자(psychiatrist)다. 『길』은 20개국어로 번역돼 2000만 부가 판매됐다. 펙은 미국 ‘근대 자기계발서(self-help books)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길』은 정신분석 상담 사례와 문학·역사·철학·예술의 연결고리를 만들었다. 요즘 말로 하면 하이브리드(hybrid)형 종합이 탁월했다.

즉시발복(卽時發福)을 약속하는 요즘의 상당수 자기계발서와는 달리 펙이 제시하는 길은 멀고도 험한 길이다. 펙은 ‘디시플린(discipline)’을 강조한다. 디시플린은 훈련·단련·수양·억제·자제·극기·기율·기강·질서·징계·징벌을 의미한다.

베스트셀러가 베스트셀러가 되는 이유는 사회인의 상처를 아물게 하고, 사회의 간지러운 곳을 긁어주고,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고름을 짜내기 때문이다. 『길』도 그랬다. ‘대박’의 배경은 사랑에 대한 기존의 생각, 전통 가치관과 신앙이 흔들리는 미국 사회였다. 오일쇼크와 베트남전의 상처로 고통받는 사회이기도 했다. 펙 스스로가 분석한 『길』의 성공 요인은 ‘누구나 다 느끼고 아는 것을 용감하게 정리했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의 크리스천들이 ‘좁은 문, 좁은 길’을 표방하는 펙을 주목했다. 기독교가 강한 미국 중남부·동남부 바이블벨트(Bible Belt)에서 책이 많이 팔렸다. 『책』은 기성 교회에 만족하지 못하고 신심이 흔들리는 수많은 크리스천의 영성에 단비가 됐다. 『길』은 주일 예배 후의 신자 토론 교재로도 사랑받았다. 신자들은 ‘원죄의 본질은 게으름이다’ ‘악마는 있다’ ‘악의 본질은 삶의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는 인간의 성향이다’ ‘사랑은 빠지는 게 아니라 일(work)이요 선택이다’ ‘은총의 순간은 평화와 감사하는 마음, 자유가 터지는 놀라운 순간’이라는 그의 주장을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아이러니는 펙이 젊어서는 선불교와 이슬람 신비주의에 심취했었다는 것이다. 그 영향이 『길』에도 나타난다. 펙은 결국 43세 때 감리교 세례를 받았지만 미국 근본주의 신앙인들은 『길』에서 발견되는 뉴에이지적 성향을 거부했다. 아랑곳하지 않고 『길』은 르네 데카르트 이래 분리의 과정을 겪은 영성과 이성, 신앙과 과학을 접합시키는 길을 제시한다. 펙에게 마음과 영혼은 같다. 정신적인 성장과 영적인 성장도 같다.

정작 저자는 책 내용대로 못 살아
사람들을 『길』을 선물용으로도 많이 샀다. 한국과 비교하면 미국은 상대적으로 노골적으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사는 사회가 아니다. 『길』을 선물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완곡어법적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너 왜 그렇게 사니. 이 책 읽고 개과천선해라, 좀.’

『길』이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가 되는 과정은 흥미롭다. 출간을 거절당하기도 했다. ‘지나치게 종교적’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출간을 결정한 출판사도 큰 기대는 안 했다. 베스트셀러를 만들려면 천문학적 투자를 하는 게 미국 출판계 관행이지만 출판사는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았다. 이 책을 ‘강추’하는 서평이 워싱턴포스트에 실리면서 변화의 조짐이 생겼다. 입소문(word of mouth)으로 차츰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 책을 읽고 인생이 바뀌었다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길』은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83년부터 13년 동안이나 머무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기네스북에도 올랐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대체하는 책이 됐다.

추종자 집단이 생겨나 펙은 마치 신흥종교 교주처럼 됐다. 기적을 바라며 그의 옷을 만지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83년에는 대통령직에 도전할 마음을 품었을 정도다. 펙은 ‘나는 결코 성인이 아니다’라는 전제하에 애독자들이 부여한 ‘선지자(prophet)’ 타이틀을 받아들였다. 정신의학자 커리어는 접는 대신 강연자, ‘영성을 말하는 심리학 전도사’가 됐다. 달려드는 여성들을 뿌리치지 못했다.

펙은 그가 지은 책에서 권고한 사항들을 실천하지 못했다. 숱한 염문, 지나친 음주·흡연에다 마리화나까지 피웠다. 아버지·형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버지는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을 숨기며 사는 ‘잘나가는’ 변호사·법관이었다. 이 사실을 폭로한 것도 펙이다. 하버드대에 갈 수 있었던 것도 아버지 ‘빽’ 덕분이었지만···. 43년 동안 그를 지킨 헌신적인 중국계 싱가포르 출신 아내 릴리 호도 결국 그를 떠났다. 자식 셋 중 두 명과는 불목(不睦)이었다.

펙을 위선자라고 할 수는 없다. 선(善)을 가장해야 위선자다. 그는 공개적으로 자신의 죄와 허물을 고백했다.

우리의 입장에서 『길』이 함의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과거 군부독재 시절 한국은 디시플린이 충만한 사회였다. 이미 사라진 군사적 디시플린을 아직도 민주적 디시플린이 충분히 대체하지 못했다. 이 사실에 『길』의 한국적 가치가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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