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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폭 마시며 남자 경찰들과 융화 … 난 생계형 음주가”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이금형 ▶1958년 충북 청주 출생 ▶77년 여경 공채 2기로 경찰 입문 ▶2000년 경찰청 과학수사계 계장 ▶2003년 충북 진천경찰서 서장 ▶2006년 서울 마포경찰서장 ▶2010년 경찰청 생활안전국 국장 ▶2011년 광주지방경찰청장 ▶2013년 경찰대학 학장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나는 생계형 음주가예요. ‘소폭을 경감·경정 때는 10잔, 총경·경무관 때는 7잔, 지금도 5잔은 거뜬히 마셔요.”

최근 경찰대학장으로 영전한 이금형(55·사진) 치안정감에게 승진 비결을 묻자 돌아온 답변이다. “남성적인 경찰문화 속에서 융화되기 위해 더 와일드하게 행동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술도 꽤 마셨다는 설명이다. 그는 “경무관을 달았을 때 주위에서 소폭 덕분이라고 얘기했을 정도”라며 웃었다.

2013년 3월 29일. 보수적이기로 소문난 경찰 조직의 ‘유리천장’에 금이 갔다. 68년 경찰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 치안정감이 탄생한 것이다. 치안정감이 어떤 자린가. 10만 경찰인력(전·의경 제외) 중 서울청장·경기청장·부산청장·경찰대학장·경찰청 차장 등 딱 다섯 자리밖에 없는 ‘넘버 투’다.

남자 동료들보다 더 와일드하게 행동
그는 1977년 19세의 나이로 고향 청주에서 순경이 됐다. 미술에 소질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본인 스스로도 특기를 살려 82년 치안본부 과학수사대의 몽타주 요원으로 선발되기도 했다.

여자로서 경찰 생활이 힘들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여자가 무얼 하겠느냐’는 색안경이 참기 힘들었다. 하지만 특유의 친화력으로 일부의 그런 시각을 불식시켜 나갔다. 남경(男警)보다 더 남성 문화에 융화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술잔도 마다하지 않고 받아 마셨고, 남자 경찰들이 사우나에 갈 때는 “나도 가고 싶다”며 달려들었다.

무엇보다 업무에 대한 열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뜨겁다는 평가다. 첫째 아이를 임신했을 땐 흉악범의 몽타주를 그렸고, 둘째 임신 때는 토막 난 시체의 지문을 찍었다. 임신한 몸이지만 몸을 사리지 않고 업무에 충실했다. 2001년 본청 초대 여성정책실장으로 근무할 땐 업무 스트레스로 열흘 동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 목소리가 회복되자 다음엔 장염에 걸렸다. 장염으로 일주일간 입원했을 때도 업무를 보기 위해 새벽에 병실을 뛰쳐나오기도 했던 ‘철의 여인’이다.

이 경찰대학장은 여성·청소년 분야에서 경찰 내 손꼽히는 전문가다. “아이들 키울 때를 떠올리며 엄마 입장에서 업무를 처리하다 보면 할 일이 너무 많고, 전문가가 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경찰의 ‘성폭력 피해자 원스톱 지원센터’ ‘183 실종아동 찾기센터’ 설치 등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2005년 제정된 ‘실종 아동 DNA법’도 그의 집념이 이끌어낸 결과물이다. 실종아동 보호시설의 아이들과, 자녀를 잃은 부모의 DNA를 채취해 아이들을 부모품으로 돌려보낼 수 있도록 한 법안이다. 법 제정을 위해 인권단체·국회·보훈처·예산처 등을 쉴 새 없이 뛰어다녔다. 그런 그를 보고 국회에서는 ‘또 이금형이 왔다’며 그의 열정에 놀라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2006년 무렵 마포는 여성들이 밤에 외출을 꺼리는 무서운 지역이었다. 여성 13명을 연쇄적으로 성폭행한 ‘마포 발바리’ 사건 때문이었다. 그런 마포 발바리도 당시 이금형 마포서장이 잡아들였다.

-업무에 열성적인 것 같다. ‘철의 여인’ ‘불도저’라는 별명도 있고.
“마포서장이나 광주지방경찰청장 등 수장으로 있을 때 부하들을 다그치고 열심히 한 건 사실이다.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경찰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이다. 더 중요한 건 성폭행이나 학교폭력을 당한 사람들의 아픔이 반복되지 않도록 시스템을 갖추는 일이다. 그런 제도적 장치를 만드는 일이 범인을 잡는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별명이 마음에 드나.
“매몰찬 면만 부각돼서 그렇다. 내가 매몰차기만 했으면 자식을 셋이나 키우고, 맏며느리로 시부모님을 모실 수 있었겠나. 일을 시키는 만큼 직원들의 애로사항을 상세히 듣고 업무에 반영하도록 노력했다. 직원들 생일도 챙겨주고, 유머집도 들고 다니며 분위기를 풀려고 애썼다. 썰렁한 개그라서 망가졌지만(웃음).”

만학도 엄마 본받아 세 딸 모두 ‘엄친딸’
이 학장은 가정도 훌륭히 꾸렸다. 그는 81년 당시 전경이던 남편과 만나 2년 뒤 결혼했다. 이들 부부의 금실은 경찰 내에서도 소문이 날 정도로 유명하다. 세 딸 중 첫째는 KAIST를 졸업하고 행정고시에 최연소로 합격해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둘째 역시 KAIST를 졸업한 후 유학 중이다. 막내는 치의학전문대학원에 다니고 있다. 소위 말하는 ‘엄친딸’들이다. “아이들 공부를 혹독하게 시킨 것 같다”고 하자 그는 “아이들 공부시킬 시간도 없었다”며 “만학도인 내가 공부하는 것을 보고 배운 것 같다. 참 기특하고 고맙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늘 바쁜 업무 탓에 아이들과 함께 있었던 시간은 적었다. 그런 엄마가 야속했던지 딸들은 농담 삼아 ‘계모’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양육에서 교육까지 시댁의 신세를 많이 졌다. 그는 막내 딸을 생각하면 특히 미안함이 앞선다고 했다. “경찰대로 발령을 받고 관사생활을 해야 해서 지난 3일 짐을 들고 집에서 나오는데 막내 딸이 머리를 감으면서 울고 있더라. 마음 약해져서 문을 나서지 못 할까봐 일부러 못 본 척하고 나왔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위해 기자가 5일 용인의 경찰대를 찾았을 때 교정에선 꽃심기가 한창이었다. 식목일을 맞아 꽃을 심어 밝은 분위기를 내보자는 이금형 학장의 아이디어였다. ‘젊은 그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리라’고 적힌 경찰대 정문이 더욱 화사해 보였다. 그에게 넌지시 “여성 대통령 덕을 본 게 아니냐”고 물었다. 그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대기업에서 자체적으로 여성 임원 비율을 올린다고 하지 않나. 정부 인사정책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을 거라고 본다. 하지만 민생치안을 요구하는 국민의 목소리가 나의 커리어와 맞아떨어진 점도 있을 것이다. 무거운 사명감 때문에 며칠 잠을 뒤척일 정도다.”

어린 시절,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포기하긴 했지만 그의 꿈은 화가였다. 이제 그의 앞에 경찰대학이라는 화선지가 놓였다. 그에게 어떻게 그림을 그릴 것이냐고 물었다. 그가 답했다. “한 학년을 경찰서 하나로 생각하고 체계적으로 가르쳐 줄 생각이에요. 112종합상황실도 만들어 실습도 시킬 거고요. 저는 우리 학생들을 보석이라고 생각해요. 경찰대학이 국민 모두의 자산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보석들을 갈고 닦아 빛나게 해줄 생각입니다.”

노진호 기자 yesn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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